'2011/05/31'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5.31 이 땅에 속하였으나 이 땅에 속하지 않음
  2. 2011.05.31 다윗언약


골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골로새서는 골로새 지역에 있는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그 편지의 수신자들을 언급할때 바울사도는 당연히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수신인을 골로새에 있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 말하면서 그들이 이 땅에 속한 자이나 또한,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닌 존재의 두 영역을 소개합니다. 성도는 세상을 살 때 항상 이와 같이 존재의 두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인이라는 신분은 한시적이고 가변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하늘 시민권은 영원히 바뀔 수 없는 신분입니다. 그러므로 불변하는 하늘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바울사도는 이 골로새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이라고 보충 설명을 합니다. “신실한” 이란 수식어는 그들의 삶을 가다듬게 하고 용기를 부여하는 말입니다. 이방신과 그 풍습이 만연한 골로새에서 소수집단인 “성도”들은 늘 사회적인 압력을 받는 자들 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며 증거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하는 압력이 그곳에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도”들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해야 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그들을 향한 주님의 수준 높은 부름에 신실하게 반응해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성도들을 끝까지 신실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까?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확신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이라고 불리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형제들과의 사귐은 골로새 같은 소읍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도움과 격려가 되지만 그들 모두 끝까지 신앙으로 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 후에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는 비슷한 내용의 인사말을 이어갑니다. 그것은 “은혜와 평강” 이라는 표현입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자발적인 호의입니다. 주님의 호의를 입은 자의 삶 속에 부어진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이 받을 자격조차 없는 인간에게 부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있을지어다” 는 단순한 인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기도가 되고 있습니다.


은혜를 기원하는 기도에 평강이 결합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인사 “샬롬”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은 자들이 그 삶속에 궁극적으로 누리는 축복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누리게 되는 복을 한마디로 말하면 샬롬이라는 것입니다. 평강은 특히 관계의 축복을 비는 말로서 사람들 사이의 평강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강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과 더불어 누리는 평강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자신과 더불어 화목한 상태, 그것이 평강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그 결과는 평강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16) 만약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 유대인, 하나님 사이에 평강을 가지고 오는 복음이라고 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그 평강이 어디에서 확인되어야 하겠습니까?

'주제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실인 -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구별된 자  (1) 2011.06.03
두 세계관의 충돌  (2) 2011.06.02
다윗언약  (0) 2011.05.31
사사기의 메시야적 관련성  (0) 2011.05.30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  (0) 2011.05.29
Posted by 굿매너
,

다윗언약

주제글 2011. 5. 31. 11:40


언약적 관점에서 다윗언약의 수립은 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잘 드러내 주며, 동시에 ‘메시야적 왕권’ 을 전형적으로 예언하였다. 히브리인들의 메시야 기대 사상은 규범적으로 다윗왕가와 연관을 맺고 있다. 하나님 자신은 그의 왕권을 다윗의 왕권과 연결하신다.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왕국이 오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언약은 그의 백성가운데 하나님의 왕국이 오는 공식적인 약정으로서 기여한다.
이러한 다윗 언약의 골자는, 다윗이 주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으려는 소원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응답으로 주신, 나단 선지자의 말 가운데 나타나 있다. 이제 다윗 언약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 후, 중심되는 요소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삼하 7:11b-17 의 약속

나단 선지를 통해서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삼하 7:11b-17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단의 예언은 다윗 왕가의 영속성에 대한 종교적 허가라 할 수 있으며 이 종교적 허가는 언약이라는 틀 속에서 구속에 대한 보충적 확증이기도 하다. 이 구절들에서 비록 언약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는 없으나, 구절내의 구조, 즉 역사적 서문(8), 핵심내용을 담은 규정(16) 등과 시 89:3-4은 이 약속을 언약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음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출을 열망하는 다윗의 소원을 유보시키며(1-7), 대신 다윗 당대의 안정과 번영(8-11a), 다윗왕의 후손들에 의해 영원히 이어지는 다윗왕조(11b-17)를 약속하신다. 혹 그들이 범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실지언정 버리시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14-16, 시 89:30-37). 따라서 이 약속은 다윗을 좇아나며 그가 이룩한 왕국을 통치하게 될 열왕의 혈통을 완전하게 보장하였다.

2. 언약의 중재자로서의 왕

왕정 수립 이후 이스라엘의 왕은 언약과 관련하여 독특한 역할을 유지한다. 즉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더욱이 왕은 백성들과의 언약을 중재한다. 언약의 중재자로서 왕은 백성 앞에서 언약의 주로서의 권위의 하나님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대표한다. 이러한 언약 중재자의 이중 책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치와도 관련되는 것으로서(14), 이런 왕의 역할이 실제로 다윗 언약의 중요한 면이 된다.

3. 언약의 신실성과 최종실현/메시야

다윗 언약은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성을 강조한다. 즉 왕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14). 여기서 나타내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다윗 왕국은 하나님에 의해 탄생된 나라라는 다윗 왕국의 기원을 말해주며, 둘째로, 범죄해도 징계로써 회개케하는 사랑으로 연합된 관계임을 주목하게 하고, 셋째로, 상속의 관계로서 영원한 기업을 물려받은 다윗왕국이 멸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성의 강조와 더불어 다윗 언약은 다윗의 후손들이 영원히 이스라엘의 보좌위에 앉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 약속에 의해서 다윗왕조는-북이스라엘 왕조와는 생생하게 대조되게-400년 이상(B.C. 1010-586) 지속되었다. 열왕기서에 기록된 다윗왕조의 역사는 이 사실을 강조해준다(왕상 11:13; 32; 34; 36, 15:4, 왕하 8:19; 34, 20:6 등). 하지만 왕조는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므낫세의 죄악(왕하 21장)을 기점으로 해서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왕하 23) 하나님은 유다를 버리신다(왕하 23:27).


그러면 언약의 신실성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구약 역사에서 다윗의 왕위 계승이 끊어진 것은 이스라엘 왕권의 예언적인 역할이라는 말로 평가될 수 있다. 즉 다윗의 통치는 다윗 왕권과 하나님의 왕권을 최종적으로 통합하는 메시야적 구원자의 실재를 그림자 형태로 예언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윗의 혈통에서 난 메시야는 언약의 최종 실현으로 언약적 신실성은 지켜지게 되는 것이다. 한 영원한 통치자를 그리고 있는,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시 2:7에 다시 언급되며, 여러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언약적 신실성은 강조되어진다(암 9:11, 호 3:5 등).

'주제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세계관의 충돌  (2) 2011.06.02
이 땅에 속하였으나 이 땅에 속하지 않음  (0) 2011.05.31
사사기의 메시야적 관련성  (0) 2011.05.30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  (0) 2011.05.29
골로새서 개관  (0) 2011.05.17
Posted by 굿매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