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들 안에서

주제글 2011. 8. 25. 15:48

골 1:14

본문은 우리가 얻은 구속을 곧 죄 사함이라고 말한다. 구속과 죄사함을 같은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구속이라는 말이 좀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죄 사함이 없는 구속은 없기에 같은 의미로 표현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본문의 의미는 “구속, 곧 죄 사함을 (지금) 누린다” 고 하는 뜻이다. 죄 사함의 축복은 흑암의 권세에서 부터 구출되는 것이요. 그 사랑하시는 아들의 통치 아래로 옮겨지는 것이다. 사탄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다. 그리스도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권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께 돌아갔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사탄은 아직 세력을 떨치는 듯 위협하지만 우리에게 더 이상 명령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 어두움 속에서 사탄의 지배 아래 욕망을 따라 살았다면, 이제 빛 가운데서 그 아들의 인도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죄 사함을 받았다” 바울은 “그 아들에 의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 아들 안에서” 라고 말한다. 즉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통해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지만 “그 아드 안에서” 라고 표현함으로써 우리가 얻은 “구속 곧 죄 사함” 이 그 아들과 연합하여 누리는 축복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골 2:12) 받는 성도가 누리는 축복이다. 달리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고 ㅏ장사, 부활에 하나 된 성도들이 누리는 본질적인 축복이 구속 곧 죄 사함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우리의 죽음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우리의 부활이다. 그와 더불어 영적으로 하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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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1:3-8

바울 사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서 감사하는 기도를 합니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기도할 때마다 잊지않고 골로새교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감사로 시작하였습니다.

4-5 절에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고 감사하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골로새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생동감 있는 믿음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로서 공급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그 삶이 역동적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결만 되어 있으면 그리스도로 부터 공급되는 생명이 넘쳐나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믿는다”고 하면서 과연 늘 하나님을 의존해서 살아가고있는지? 아니면 내가 열심히 일하고 내 계획을 의ㅣ지하고 살아가고 였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성도들들 향한 또는 모든 성도들 안에서 교제하는 그런 사랑의 교제를 말합니다. 현대는 사랑에 목말라 있는 시대입니다. 늘 사랑에 목말라 있고 늘 사랑 받기를 갈구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반영으로서 이 사랑의 특징은 “모든 성도에게”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기질이 같고 성격이 통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식을 넘어서는 전교인에 대한 차별이 없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모든 성도들얼 서로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면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은 따라옵니다. 기독교인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사랑은 감상적이고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했는데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에 근거합니다”라고 하면서 믿음과 사랑의 동기를 유발시키는 능력으로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땅에 쌓아 놓은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쌓아놓은 소망은 안전합니다. 아무도 이 소망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약속하신 소망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면 골로새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을 더욱 새롭게 하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바라는 소망은 무엇입니까ㅜ 믿음과 사랑의 삶을 지속적으로 갖게 하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27)” 에바브라가 그들 가운데 선포한 복음의 핵심이 그리스도가 골로새 성도가 바라볼 영광의 소망입니다.


우리도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비밀의 영광의 소망 그리스도를 붙드십시오. 중요한 것은 주인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온몸이 머리로 부터 마티와 힘줄로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또하 ㄴ마디와 힘줄이 서로 연결되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심으로 공동체는 자랄 것입니다(엡 11)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3:4)께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망에 따라 살지 않습니다. 순간의 쾌락에 몸을 맡기지 않습니다.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고 믿음과 사랑을 새롭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그리스도를 믿으으로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히 사는 것을 또한 믿습니다. 영광의 소망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십시오. 소망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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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최초의 순교자 아벨에서부터 시작해서 구약전체와 중간기를 거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 후 믿음의 선진들이 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도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로 언급된 사람들이 그들에게 약속된 것을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노아에게 약속한 것이나,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 약속한 이삭이나, 라합에게 약속한 것등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약속도 받았습니다(33)

그렇다면 왜 히브리서 11장 39절에서는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의 조상이들이 현세에서 받게되었던 약속을 초월하는 미래적이고 내세적인 약속에 대한 특징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믿음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탁월해 보이는 믿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속에서 증거를 받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믿음의 조상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이미 죽은 시체와 같이 생기나 생명과는 무관한 자들이었지만 믿음으로 약속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약속된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서 보고 있는 것(13)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서 사는 자신들을 이방인이요, 나그네라 하였고 본향을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아브라함이 실제로 보고 있고 바라고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현세에서 얻고 누리는 약속의 성취는 그 자체로 약속의 완전한 성취가 아니며 단지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질 종말론적인 완전한 약속의 성취를 미리 보는 예고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언급된 믿음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은 종말론적인 것이며 멀리서 보고 희미하게 보지만 분명히 확신하고 증거를 가지고 증언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담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았고, 아들을 바칠 수 있었고,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고, 12아들에게 축복하였고, 애굽을 떠날것을 기대하였고, 목숨을 걸고 아이를 지켰으며, 동족을 배반하는 일까지 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종말론적인 약속의 성취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야 말로 명백한 믿음의 대상이며 목적이며 약속이며 성취인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조상들이 믿고 바라보았던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조상들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바로 지금 신약시대인 지금 우리에게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에 충실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40절은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구약의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바라보았던 믿음의 대상이고, 증거를 얻게 한 동기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좋은 것” 은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2-44절에는 이미 신약의 신실한 성도들이 천상적인 예루살람에 도착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도 우리와 함께 온전함을 받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함을 받게 되는 것으로 그들이 생전에는 받지 못하였던 것이지만 이제 우리는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을 사는 성도들에게는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굳고 담대하고 순수하며 녿은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들보다 더 신실한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들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이지만 천국에서는 가장 낮은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은 구약의 성도들이 당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희미하고 멀리서 보는 것 같은 것을 보면서도 확신속에서 살았는데,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연합하여 함께 사는 우리에게는 더 나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미 그리스도라고 하는 실체가 우리에게 오셨고 희미하지 않고 선명해서 그분을 따라살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상의 기업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천상적이고 종말적인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신실하고 충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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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

주제글 2011. 7. 9. 04:42


위클리프 사전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엘리야의 시종이며 후계자. 엘리사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를 의미한다.


  • 배경

엘리사는 요단 골짜기에 있는 아벨므흘라 출신 사밧의 아들이었다. 엘리야가 그를 부르기 위해서 갔을 때, 엘리사가 열 한 겨리의 소로 밭을 갈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가족은 상당한 부자였던 것 같다. 엘리사는 아주 어렸지만, 그의 소 한 겨리를 제물로 바칠 정도로 경건성이 대단하였다(왕상 19:16, 19-21)

  • 사역의 범위

그의 예언 사역은 북왕국의 여호람, 예수, 여호아하스, 그리고 요아스 치세에 해당되는 기원전 9세기 후반부에 이루어졌다. 그의 사역은 빚진 과부에서 부터(왕하 4:1), 부자와(4:8) 이스라엘 궁궐에까지(5:8, 6:9, 12, 21-22, 6:32-7:2, 8:4, 13:14-19) 미친다. 더 나아가서 다른 왕들과(유다의 여호사밧 - 왕하 3:11-19, 수리아의 벤하닷 - 8:7-9) 고위 신하들이(수리아 군대의 나아만 - 5:1, 9-19) 그의 도움을 원하였다. 그는 엘리야의 사명을 완성하고(왕상 19:15-16), 하사엘을 수리아의 왕으로(비교 왕하 8:12-13),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비교 왕하 9:1-10) 기름 부음으로서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나라의 영적인 전쟁에 대한 엘리사의 가장 큰 업적은 사무엘의 전통을 따라서 여러 중심지에 선지 학교를 주관한 데 있다(왕하 4:38-44, 6:1-7, 비교 삼상 19:20).

  • 기적

엘리사는 큰 기적을 행한 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성경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그보다 더 많은 이적과 기사를행한 사람은 없다. 모세 같은 선지자로서(신 18:15) 엘리사는 더러워진 물을 깨끗하게 하였고(왕하 2:19-22, 비교 출 15:22-25), 사막에서 물이 나오게 하있다(왕하 3:9, 16-20, 비교 출 17:1-6). 그는 과부에게 엘리야와 같은 기적을 행하였고(왕하 4:1-7, 비교 왕상 17:8-16), 죽은 자를 살려내기도 하였다(왕하 4:18-37, 비교 왕상 17:17-24), 그리스도의 기적과 비슷하게 그도 문둥병자를 고쳤고(왕하 5:14, 비교 막 1:40-44, 눅 17:11-19), 떡을 많게 하였다(왕하 4:42-44, 비교 마 14:16-21, 15:32-38), 또한 빌려온 도끼 자루가 뜨도록 한 것과(왕하 6:5-7),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약속한 것(4:11-17), 후게 그 여인이 기근을 피해 떠날 수 있도록 예언한(8:1)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도 우리 주처럼 긍휼히 여기는 지극함이 드러난다.

  • 인격

고행적이며 사람들 앞에서 떠나기를 바라던 엘리야와 대조적으로, 엘리사는 자기가 상대했던 백성들에게 가까이 가서 함께 사회 생활을 하였다. 그는 수도 사마리아에 집이 있었으나(왕하 6:32), 사무엘이 행한 것 같이 계속 그 나라를 이곳 저곳 찾아다녔다. 그는 자주 수넴에 있는 자기 친구들을 방문하였다. 엘리사는 하사엘이 이스라엘에게 가져다 준 무서운 재난을 잘 알고서, 그에게 말할 때 눈물을 흘렸다(왕하 8:11-12).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새 선지자를 대머리라고 조롱한 젊은이들과 그를 조롱한 불신에 대해, 사마리아에서 한 신하에게(왕하 7:1-2) 심판을 선언하기도 하있다(왕하 2:23-24, 비교 레 13:40-46). 확실히 엘리사의 사역은 세례 요한에 의해서 재현되었다(마 17:10-13).

  • 사역의 시작

여호사밧왕 때 이스라엘과 유대 군대의 종군 선지자로서(왕하 3:11-19), 엘리사의 첫번째 공생애는 엘리야의 승천 이전인 것 같다(2:1-18). 엘리야는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왕에게 심판물을 써 보냈었다(대하 21:12-15). 그 원정에서 엘리사는 계속 엘리야의 시종이었고,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왕하 3:11) 사람이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자기 주인의 온전한 능력과 신을 부여받지 못했었다. 이것은 그가 예언하기 전 거문고 타는 자를 그 날에 불러오게 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3:15, 비교 삼상 10:5-6, 대상 25:1). 엘리야가 떠날 때 엘리사가 두 몫을 요구한 것은 신 21:17 의 기업의 법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 경우에 능력있는 선지자의 수제자의 특권으로서 장자의 분깃과 같은 권리를 요구하였다. 히브리 본문 베루하카 엘라이 에 의하면 엘리사는 스승에게 나타났던 성령의 역사가 자신에게 갑절이나 임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왕하 2:9). 따라서 엘리사가 자기 스승의 능력보다 두 배 혹은 그 이상이 되도록 요구한 것으로 추측해서는 안된다.

  • 마지막 사역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올라갈 때, 어린 선지자는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왕하 2:12) 라고 외치며, 엘리야가 배교 때에 이스라엘을 위한 영적 방위군, 실제의 '군대'였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반 세기 후에 같은 외침이 요아스왕에 의해 엘리사에게 행해졌다(왕하 13:14). 그가 죽을 때, 선지자는 자신의 마지막 역할, 즉 수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을 방어하도록 왕에게 권고하는 일을 수행하였다(13:15-19). 왕이 화살을 쏘고 자기의 화살로 거듭 땅을 치는 그러한 객관적 표현은 구약에서 예언적인 심판과 함께 자주 나타난다. 엘리사는 죽은 후에도 영향력이 계속되었다.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마침 적이 침공하여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에 급히 던지자, 기적적으로 그 죽은 사람의 몸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자 곧 소생하였다(왕하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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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선교사는 1840년 9월 영국 웨일즈(Wales) 지방 라야다(Thayada)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New College)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목회보다는 선교에 뜻을 두고, 갓 결혼한 부인과 함께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목사 안수를 받던 해에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해 가을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불행하게도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다가 현지 런던선교회 책임자들과도 뜻이 맞지 않아 토마스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로 가서 세관에 취직하여 일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주재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을 만나게 되어 선교에 대한 열정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국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으로 피난을 온 한국인 천주교 신자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한국 천주교회가 어떻게 박해를 받고 있는가를 알게 된 그는 한국 선교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그가 세관에 사표를 내고, 한국 선교의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한국으로 가는 배를 한 척 만나, 윌리암슨이 제공해 준 한문 성경들을 많이 갖고 한국의 서해안으로 떠난 것이 1865년 9월 이었다.

그는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昌麟島)에 도착하여, 약 두 달 반을 머물면서 섬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는 한편, 한국말을 배우면서 열심히 전도하였다. 가능하다면 국왕을 만나서 선교의 윤허를 받기를 원하였으나, 휘몰아친 태풍으로 만주 해안에 표류한 끝에 1866년 1월 어렵게 북경까지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런던선교회에서 경영하던 북경대학의 학장 서리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의 관심은 여전히 한국 선교에 모아져 있었다.

기회를 다시 찾고 있던 토마스는 천진에 체재 중인 미국 프레스톤(Preston)이 병약한 몸의 요양을 위해 여러 곳을 항해하던 중 그의 소유 상선 제네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많은 물건을 싣고 한국에 상업 차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1866년 7월 그는 그 배의 통역 겸 안내자로 동승하게 되었고,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던 한국으로 다시 향하게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런던선교회에 보낸 편지에 그때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생각에 가슴이 부풉니다....[런던 선교회] 이사들이 이 성경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아무런 인간의 과오가 혼합되지 아니한 심정으로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인정해 주리라 믿으면서 나는 갑니다.

약 일주일 후 셔먼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여, 계속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평양으로 행진하였다. 배가 머무는 곳에 문정관(問情官)이 와서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고, 토마스는 서투른 우리말로 통역을 맡았다. 문정관들은 무역을 하러 왔다고 대답하는 선원들에게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물러가라고 말했지만, 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상류로 항진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셔먼호는 무역선 답지 않게 중무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한국측에서는 퇴각 명령을 무시하고 상류로 깊숙히 진입해 들어오는 이 배에 대해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그 선원들이 문정(問情)을 하러 올라간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억류하고, 강압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강변의 병졸들과 성민들은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이에 셔먼호에서도 위협을 느껴 병졸들과 성민들을 향해 소총과 대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고 서해에 썰물 때가 되어 강물이 급격히 줄어들자 셔먼호는 강바닥에 좌초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의 명에 따라 상류에서 병졸들이 작은 배들을 여러 척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붙인 신탄선(薪炭船)을 떠내려보내자 셔먼호에 이르러 배가 불타기 시작하였다. 배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올라오게 되었고,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이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죽였다.

토마스 목사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서 성경 몇 권을 가슴에 품고 강으로 뛰어 내려 헤엄쳐 나왔다. 헤엄쳐 나온 토마스 목사를 퇴교(退校) 박춘권(朴春權)이 칼로 쳐 죽임으로써 그는 한국초기 선교역사에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 순교자가 되었다. 그가 순교하던 때 그의 나이 27세 였다.

토마스 목사는 가슴에 품고 온 성경을 여기 저기 뿌렸고,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도 성경 한 권을 주었는데, 박춘권은 처음에는 받지 않았으나 되돌아갈 때 이것을 주워 집으로 가지고 갔다. 갖고 간 성경을 읽은 그는 후에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었으며 안주교회의 영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군중 속에 12살 난 소년, 최치량최치량(崔致良)이 있었는데 그는 토마스 목사가 던져준 성경 3권을 주워 갖고 있다가 두려워 그 중 한 권을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주었는데 그는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발라 쓴 것을 최치량이 후에 그의 집에 갔을 때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박영식의 집터에는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서게 되었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가 박영식의 집에 왔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예수를 믿고 후에 평양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 이눌서(李訥瑞, William Reynolds)의 조사(助事)가 되어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큰 공헌을 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박춘권의 칼을 맞고 죽었으며 그 시체는 토막 났고 이어 강변에서 불태워졌다. 셔먼호의 닻줄은 평양 대동문에 걸어 놓아 해방되던 1945년까지 남아 있었다. 그는 개신교 목사로서 이 땅에 최초로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어갔는데 이때가 1866년 9월 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갔지만, 그가 전해준 복음은 한국 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그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신 많은 평양 성민들이 예수를 믿어, 평양은 한국 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동양의 예루살렘”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1927년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그가 죽어 묻혔 있다고 생각되는 쑥섬에 1천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고, 1932년에는 토마스 목사의 이름 첫 자인 “T”자 모형의 토마스 목사 기념예배당을 지어 총회원 일동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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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스메랄다님의 질문 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나실인(נזיר, nazir)은 히브리어의 '나지르'('분리하다, 절제하다'라는 뜻)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이러한 나실인은 성별에 관계없이 특정기간이나 평생토록 하나님을 섬기기로 서원을 한 평신도(삼손, 사무엘, 레갑족속, 세례요한, 사도바울 등)입니다. 따라서 나실인은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소산을 마실 수 없었으며(민수기 6:3-4), 머리를 깍을 수도 없고(민수기 6:5), 죽은 사람을 가까이 함으로서 자신을 더럽히는 행위를 할 수 없었습니다(민수기 6:6-7). 또한 몸의 거룩한 구별(민수기 6:8)과 도덕적 정결(아모스 2:11-12) 등을 지켜야 했습니다.

나실인이 지켜야할 규정은 특별한 방법으로 어떤 사물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시된 사물들은 그것 자체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나실인이 거룩함과 헌신을 추구할 때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열거된 것들입니다.


첫째는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물론이고 껍질이며 씨앗까지 먹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육체적 만족을 위해서만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과 세상적 쾌락으로 부터 자신을 정결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포도주와 같은 일시적으로 기분을 고조시키는 것등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로 부터 돌이켜서 하나님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로부터 영혼의 양식과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이 나실인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의 금식 후 사단의 시험을 받을 때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고 하시면서 세상적 쾌락과 포만감을 좇아살아가는 삶이 아닌 구별된 삶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하십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의 목적을 가지게 되는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에 귀결이 됩니다. 거룩한 삶의 구별은 그 자신의 수행적 삶을 살아가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쾌락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하고 거룩하고 헌신된 삶을 살면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살고 내가 즐기는 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삶을 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목적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여 따르는 성도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나실인과 같은 영적인 삶, 나실인과 같은 육적인 삶을 균형있게 가져야 하고, 또 그러기를 무던히 애쓰는 자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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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서에서는 충돌하고 있는 두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이념입니다.

하나는 하만에 의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운명을 자신의 야망과 능력과 갖가지 노하우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처세술로 개척해 나가려는 인물입니다. 이런 세계관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고대의 모든 세계에 팽배한 세계관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에서 신은 그러한 자신의 처세술로써 이용할 또 하나의 대상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고 뭔가 그 신에게 하는 신앙의 행태 조차도 그 신을 이용하거나 자신의 의도대로 인생을 움직여가려는 기본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모르드개와 에스더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현재 위치와 형편, 지위와 할 일들이 하나님의 뜻과 의도에 따라서 진행되고 있음을 강하게 확신하고 그 일을 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뜻과 내 의도가 아니라 현재의 이 상태가 하나님의 선하신 것을 반영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하는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 일을 위함인지 아느냐?”라고 물어보는 것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왕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뭔가 감사할 만한 인생의 성취로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좀더 생각해 보자면 하만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시작되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죽음의 위협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과정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일은 모르드개를 비롯해 에스더와 수산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훈련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더서 본문의 사건에 대한 모르드개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매우 충격을 받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힘들어지거나, 어려워지거나, 곤란한 상황 정도가 아니라 더 이상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절명의 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성경의 고대 중동의 상황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본문 속에서 유대인들에게 벌어진 사건은 매우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마치 대한민국에서 오늘 하루동안 주일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은 모두 죽여도 된다. 그들의 집은 방화해도 된다고 하는 법이 제정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재산을 몰수하고 직장을 박탈당하는 등이 일이 하루 아침에 벌어졌다면 우리는 절명의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그것보다 더 절망적인 사건입니다.


그런 와중에 재를 뒤집어쓰고 굵은 베옷을 입고 절망가운데 빠져있는 모르드개의 모습은 에스더에게 근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여기서 우리가 볼 것은 에스더의 심경의 변화입니다. 모르드개는 궁중의 삶을 모릅니다. 사실 에스더의 여러움을 헤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에스더는 이미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지 한달이 넘고 있었습니다. 에스더의 입장에서 자신도 매우 어렵고 왕궁에 있다고 해서 편안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르드개는 이해하기 어려운 더 어렵고 힘든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르드게가 에스더에게 전한 말입니다. “지금 당신의 위치가 이 날을 위한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 말은 당신의 현재 위치와 현재 형편과 지금의 극도의 고통이 하나님의 준비한 일인지 모르는가?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더에게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였습니다. 이미 에스더는 죽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가 육체적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이미 죽음이 지나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 후의 시간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은 그런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왕에게 나아가기로 하였을 때 에스더는 금식기도를 요청합니다. 모든 것을 절제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여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한 기도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3일의 금식은 사실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에스더의 마음의 외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도와 섭리가 승리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그 이후의 본문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역사의 처음과 진행과 끝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 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에스더와 유대인들은 훈련을 받게 됩니다. 자신의 현실을 보는 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현실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으로 만족하게 하는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하여 살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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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골로새서는 골로새 지역에 있는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그 편지의 수신자들을 언급할때 바울사도는 당연히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수신인을 골로새에 있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 말하면서 그들이 이 땅에 속한 자이나 또한,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닌 존재의 두 영역을 소개합니다. 성도는 세상을 살 때 항상 이와 같이 존재의 두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인이라는 신분은 한시적이고 가변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하늘 시민권은 영원히 바뀔 수 없는 신분입니다. 그러므로 불변하는 하늘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바울사도는 이 골로새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이라고 보충 설명을 합니다. “신실한” 이란 수식어는 그들의 삶을 가다듬게 하고 용기를 부여하는 말입니다. 이방신과 그 풍습이 만연한 골로새에서 소수집단인 “성도”들은 늘 사회적인 압력을 받는 자들 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며 증거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하는 압력이 그곳에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도”들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해야 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그들을 향한 주님의 수준 높은 부름에 신실하게 반응해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성도들을 끝까지 신실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까?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확신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이라고 불리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형제들과의 사귐은 골로새 같은 소읍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도움과 격려가 되지만 그들 모두 끝까지 신앙으로 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 후에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는 비슷한 내용의 인사말을 이어갑니다. 그것은 “은혜와 평강” 이라는 표현입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자발적인 호의입니다. 주님의 호의를 입은 자의 삶 속에 부어진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이 받을 자격조차 없는 인간에게 부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있을지어다” 는 단순한 인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기도가 되고 있습니다.


은혜를 기원하는 기도에 평강이 결합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인사 “샬롬”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은 자들이 그 삶속에 궁극적으로 누리는 축복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누리게 되는 복을 한마디로 말하면 샬롬이라는 것입니다. 평강은 특히 관계의 축복을 비는 말로서 사람들 사이의 평강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강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과 더불어 누리는 평강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자신과 더불어 화목한 상태, 그것이 평강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그 결과는 평강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16) 만약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 유대인, 하나님 사이에 평강을 가지고 오는 복음이라고 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그 평강이 어디에서 확인되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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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언약

주제글 2011. 5. 31. 11:40


언약적 관점에서 다윗언약의 수립은 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잘 드러내 주며, 동시에 ‘메시야적 왕권’ 을 전형적으로 예언하였다. 히브리인들의 메시야 기대 사상은 규범적으로 다윗왕가와 연관을 맺고 있다. 하나님 자신은 그의 왕권을 다윗의 왕권과 연결하신다.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왕국이 오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언약은 그의 백성가운데 하나님의 왕국이 오는 공식적인 약정으로서 기여한다.
이러한 다윗 언약의 골자는, 다윗이 주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으려는 소원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응답으로 주신, 나단 선지자의 말 가운데 나타나 있다. 이제 다윗 언약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 후, 중심되는 요소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삼하 7:11b-17 의 약속

나단 선지를 통해서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삼하 7:11b-17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단의 예언은 다윗 왕가의 영속성에 대한 종교적 허가라 할 수 있으며 이 종교적 허가는 언약이라는 틀 속에서 구속에 대한 보충적 확증이기도 하다. 이 구절들에서 비록 언약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는 없으나, 구절내의 구조, 즉 역사적 서문(8), 핵심내용을 담은 규정(16) 등과 시 89:3-4은 이 약속을 언약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음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출을 열망하는 다윗의 소원을 유보시키며(1-7), 대신 다윗 당대의 안정과 번영(8-11a), 다윗왕의 후손들에 의해 영원히 이어지는 다윗왕조(11b-17)를 약속하신다. 혹 그들이 범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실지언정 버리시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14-16, 시 89:30-37). 따라서 이 약속은 다윗을 좇아나며 그가 이룩한 왕국을 통치하게 될 열왕의 혈통을 완전하게 보장하였다.

2. 언약의 중재자로서의 왕

왕정 수립 이후 이스라엘의 왕은 언약과 관련하여 독특한 역할을 유지한다. 즉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더욱이 왕은 백성들과의 언약을 중재한다. 언약의 중재자로서 왕은 백성 앞에서 언약의 주로서의 권위의 하나님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대표한다. 이러한 언약 중재자의 이중 책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치와도 관련되는 것으로서(14), 이런 왕의 역할이 실제로 다윗 언약의 중요한 면이 된다.

3. 언약의 신실성과 최종실현/메시야

다윗 언약은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성을 강조한다. 즉 왕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14). 여기서 나타내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다윗 왕국은 하나님에 의해 탄생된 나라라는 다윗 왕국의 기원을 말해주며, 둘째로, 범죄해도 징계로써 회개케하는 사랑으로 연합된 관계임을 주목하게 하고, 셋째로, 상속의 관계로서 영원한 기업을 물려받은 다윗왕국이 멸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성의 강조와 더불어 다윗 언약은 다윗의 후손들이 영원히 이스라엘의 보좌위에 앉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 약속에 의해서 다윗왕조는-북이스라엘 왕조와는 생생하게 대조되게-400년 이상(B.C. 1010-586) 지속되었다. 열왕기서에 기록된 다윗왕조의 역사는 이 사실을 강조해준다(왕상 11:13; 32; 34; 36, 15:4, 왕하 8:19; 34, 20:6 등). 하지만 왕조는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므낫세의 죄악(왕하 21장)을 기점으로 해서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왕하 23) 하나님은 유다를 버리신다(왕하 23:27).


그러면 언약의 신실성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구약 역사에서 다윗의 왕위 계승이 끊어진 것은 이스라엘 왕권의 예언적인 역할이라는 말로 평가될 수 있다. 즉 다윗의 통치는 다윗 왕권과 하나님의 왕권을 최종적으로 통합하는 메시야적 구원자의 실재를 그림자 형태로 예언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윗의 혈통에서 난 메시야는 언약의 최종 실현으로 언약적 신실성은 지켜지게 되는 것이다. 한 영원한 통치자를 그리고 있는,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시 2:7에 다시 언급되며, 여러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언약적 신실성은 강조되어진다(암 9:11, 호 3:5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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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의 메시지는 대부분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고집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메시야적 메시지가 두드러진 한 부분이라면 이스라엘의 필요와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들으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것 - 메시야적 중요성(의미) - 라는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첫째,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언급(삿 2:1-5)은 여호와의 임재가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호와의 사자의 모습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두 가지 이다. (1)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결코 깨뜨리지지 않으실 것이다.(언약 중재자. 곧 육체를 입고 오시는 메시야가 확실하게 이렇게 말했다) (2) 이스라엘의 고의적인 언약 파괴로 인해 언약의 조항들에 담긴 저주가 실행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멸망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약속받은 기업에서 완전한 “구원”을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재판관으로서 이렇게 말했다.

둘째, 왕권 개념이 백성들 앞에 주어졌다. 여호와께서 세우셨고 성령이 그 위에 임한 사사들은 자신들의 인성과행동들 속에서 족장들과 모세와여호수아 시대에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되고 표현되었던 메시야적 왕권을 얼마간 나타내 보였다.

셋째,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우 구해내고 이들이 여호와를 섬기며 살 수 있도록 자유를 회복시켜주는 임들이, 다시 말해 넓은 의미에의 메시야 개념에서 중요한 측면들인 임무들이 수행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메시야 개념이 계시되었고 메시야 사역이 수행되었다.

넷째, 어떤 학자들은 사사기의 가장 큰 공헌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해 왔으며, 이러한 지적은 올바른 것이었다. 즉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임재하고 활동하는(임마누엘의 원칙이라는 의미에서) 메시야를 항상 필요로 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 땅의 모든 유익들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들은 순종하는 왕적 종은 물론이고 성별된 제사장과 성실한 선지자적 목소리가 절실히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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