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스메랄다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 D. 스틸, C. 토머스 / 엠마오" 에서 요약 발췌하였습니다

알미니안파의 항의

1610년 네덜란드에서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제임스 알미니우스가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1년 후에 그의 가르침을 근거로 해서 그의 추종자들이 5개의 신앙조항을 작성하였다. 알미니안 - 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 - 들은 그들이 작성한 신앙에 대한 5개조의 교리를 네덜란드 정부에 제출했다. [각주:1]

알미니안들은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으로 변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전적 무능, 무저건적 선택 혹은 예정, 특별한 구속, 불가항력적인 은총, 성도의 견인에 관한 교리들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들은 위와 같은 내용들에 대한 네덜란드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변경되기를 원했다.

알미니안주의의 철학적 근거

제임스 패커는 알미니안파 속에 형성된 사상체계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것이(역사 속에 알미니안주의로 알려진) 가지고 있는 신학은 두 가지 철학적 원리에 기초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은 인간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어서 인간의 책임과도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능력(ability)은 의무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들로부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추론을 이끌어 냈다. 첫째 성경은 믿음을 자유롭고도 책임을 져야만 할 행위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믿음은 하나님에게 원인을 두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해서 인간이 독립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성경은 믿음을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할 의무라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보편적인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추론을 통해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경이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결코 완전히 부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이 자신 앞에 놓여질 때 그것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2.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므로 그것을(복음을) 거부할 수도 있다.
  3. 구원 얻을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그들이 스스로 가지는 믿음에 따라서 이루어질 것임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의해 촉진되어진다.
  4.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사람의 구원을 완전하게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 믿음을 보장해 주는 그러한 선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가능성을 창조한 것일 따름이다.
  5. 믿음을 지키고 은총의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있는 관건은 신자들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러므로 실패하는 자들은 유기 된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구원하는 믿음은 자기 안에 계시는 하나님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로 간주된다.

도르트회의

1618년 알미니우스의 입장을 검토해 보기 위하여 도르트에서 국제적인 종교회의가 소집되었다. 그 회에는 84명의 회원이 참가한 것 외에도 18명의 정부에서 나온 위원들이 참석했고 독일, 신성로마제국, 스위스 및 영국으로부터 온 27명의 대표도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개월 동안 모두 154회의 회의가 열렸고, 마지막 회의는 1619년 5월 9일 이었다. 워버튼(Warburton)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총회는 항론파가 발전시킨 5대 교리에 대해서 세밀하게 검토하면서 그들의 가르침을 성경의 증언과 상호 비교하였다. 그곳에 참석한 회원들은 항론파가 믿음의 법칙으로 유일하게 수용한다고 명확하게 밝히면서 선포했던 가르침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되지 않음을 보고, 그것을 만장일치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 총회에 참석한 회원들은 단순한 기각은 충분하지 못한 것이라 보고, 논의 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칼빈주의적인 참다운 가르침을 밝히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칼빈주의적 입장을 5개의 장으로 구체화시켜 밝혔는데 이것을 칼빈주의 5대 교리라 부른다.




칼빈주의 5대 교리와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의 상호비교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

칼빈주의 5대 교리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

비록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영향을 받았지만 인간의 영적 상태가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처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모든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게도 하시고 믿게도 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신다.

죄인은 각각 자유의 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의 영원한 운명은 그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간의 자유는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그의 녕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그의 죄된 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죄인은 각자 하나님의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을 얻거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여 멸망에도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기된 죄인은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자신이 믿기 전에 성령에 의하여 중생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이고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일에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구원 얻는 일에 공헌할 수 있다.

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에 이르는 어떤 사람들을 선태하신 근거는 그들이 하나님ㅇ 븨루스임ㅔ 응답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유롭게 복음을 선택하여 믿음을 가진 자들을 미리 아시고 그들만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지고 또 제약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선택의 근거로 삼으시는 믿음이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죄인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결과일 따름이다. 아떤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되는 선택 역시 그러하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선택할 자들을 미리아시고 그들을 택하셨다. 결국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보편 구속 혹은 일반 속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는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과 각 사람들을 위해서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그를 믿는 자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인들을 용서하는 일에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믿는다는 구원의 조건이 있으므로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물리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선택을 하는 조건에서만 효과적이다.

성령은 효과적으로 거부될 수 있다

성령은 복음의 초청에 의해 외적으로 부름을 입은 자들을 내적으로 부르신다. 성령은 죄인들이 구원 얻기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자유한 만큼 성공적으로 성령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있다. 성령은 죄인이 믿지 않는 한 중생시킬 수 없다. 즉 믿음(인간이 공헌하는 부분)이 선행해야만 중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함에 있어서 성령을 제한한다. 성령은 그와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자들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

죄인이 응답하기 전에는 성령께서 생명을 주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거부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고 방해받을 수도 있으며, 또한 종종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은혜로부터의 타락

믿고 진실로 구원을 얻는 자들도 믿음과 그 이외의 것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모든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 점에 대해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고 주장하는데 결국 죄인이 한번 거듭나게 되면 그는 결코 유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알미니안에 의하면 :

구원은 (주도권을 가지신) 하나님과 (반드시 응답해야만 하는) 인간의 노력이 결합됨으로써 완성된다.

여기서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구원을 제공하셨지만, 그의 구원에 대한 준비는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협력할 것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은총의 제안을 받아 들이는 자에게만 효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인 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구원의 선물을 받을 자를 결정하게 된다.

※ 도르트 총회에서 거부됨 :

(비록 이러한 순서로 나열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항론"(Remonstrance)에 담겨진 사상의 체계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것을 1610년 네덜란드 교회에 제출하였고, 이것은 1619년 비성경적이라는 이유로 도르트 총회에서 거부되었다.

전적 무능력 혹은 전적 부패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 위해 복음을 믿는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력해졌다.

죄인은 하나님의 일들엘 관해서는 죽었고, 눈이 멀었으며 듣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의 마음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고 전적으로 부패해 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하지 못하며 그것은 그의 악한 본성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죄인된 인간은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악에 대하여 선을 택하지 않으며 사실은 할 수도 없는 상태이다.

결국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의 사역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성령의 다시살게 하심과 새로운 본성을 주시는 사역에 의해 죄인은 중생하게 된다.

믿음은 인간이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믿음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지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물은 아닌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목적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은 오직 그의 주권적인 의지에 근거하는 것이다.

특정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결코 죄인이 가지는 믿음이나 회개등과 같은 미리 알 수 있는(예지할 수 있는) 반응에 의한 것이거나 인간의 순종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가 선택하신 각 사람에게 믿음과 회개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결국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가지는 어떤 덕이나 예지할 수 있는 행위에 근거해서 결정되거나 제약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시는 것에 있다.

특별 구속 혹은 제한 구속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피택자들만 구원하려는 것으로써 실제적으로 그들만의 구원을 보장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떤 특정한 죄인들을 대신해서 당하신 형벌로써 대속의 인내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시는 것과 더불어 자신에게 그들을 연합시키시는 일은 물론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보장한다.

믿음의 은총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 주신 모든 자들에게 골고루 적용되며, 따라서 그들의 구원은 확실하게 확증된다.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 혹은 거부할 수 없는 은총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구원의 외적 부르심에 더하여 성령께서는 택함받은 자들을 향해 반드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지속해서 모든 사역을 하신다.

외적 소명(모든 사람들에게 구별없이 하시는 소명)은 거부될 수도 있고 종종 그렇게 된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적 소명(오직 택한 자만을 부르시는 소명)은 거부될 수 없다. 성령의 내적 소명은 인간을 항상 회개로 초대한다. 이런 특별한 소명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성령께서는 구원을 적용시키심에 있어서 결코 인간의 의지에 제한받지 않으시며, 구원의 성공에 있어서도 결단코 인간과 협동하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그의 은혜로 택함받은 죄인을 협력하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며, 자유롭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은혜가 미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구원이 이루어진다.

성도의 견인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으며, 성령에 의해 믿음을 부여받은 모든 자들은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된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며, 그 결과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 칼빈주의에 의하면 :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해 성취된다. 아버지는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아들은 그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성령은 택한 자들을 믿음과 회개에 이르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효과 있게 만드셨다. 또한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복음에 기꺼이 순종하게 하셨다.

모든 과정(선택, 구속, 중생)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받을 자를 결정하신다.

※ 도르트 총회에서 재확인됨 :

이 신학체계는 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성경에 담긴 구원의 교리로서 재확인 되었다.

이 체계는 당시에 "5대 교리"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제출한 5대 교리에 상응하는 대답을 하기 위해) 로 형성되었고, 이때 이후로 "칼빈주의 5대 교리" 로 알려지게 되었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

존 칼빈이나 제임스 알미니우스의 이름이 붙은 두 체계는, 그들 스스로 그 기본적인 개념을 만든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래 전에 이미 만들어진 것들이다. 각 체계의 기본적인 원리는 이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전인 수세기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예를 들어 칼빈이 지닌 기본적인 교리들의 입장은 이미 주후 5세기에 펠라기우스(Pelagius) 와 논쟁한 어거스틴(Augustine) 이 옹호한 것들이다. 커닝햄(Cunningham) 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칼빈의 칼빈주의 속에 그 본질상 아무런 새로운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알미니우스의 알미니안주의 속에도 새로운 것이 없다... 알미니우스의 교리들은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Clemens Alexandrinus) 시대 정도로 되돌아 가서 3~4 세기에 있었던 교부들의 수많은 논쟁들 속에서 이미 주장되어 졌으며, 당시의 부패한 세속철학의 영향을 받은 교회 속에 널리 유포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5세기의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알미니우스보다 건전한 교리로부터 더 이탈한 것은 사실이지만, 명확한 것은 알미니우스 처럼 칼빈주의를 반대했다는 점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 생긴 악한 영향은 그의 자손에게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펠라기우스는 모든 어린아이는 아담이 타락 전에 가졌던 것과 똑같은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이런한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상은 인간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자유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안에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지키고 복음을 믿을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한편 어거스틴은 인간의 본성이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했기 때문에 누구도 자기 스스로 율법이나 복음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했다ㄷ. 그는 신적인 은총은 죄인들이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며, 이 은총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영생할 수 있다록 예정하신 사람에게만 국한되게 미친다고 주장했다. 결국 믿음의 행위는 죄인이 가지는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펠라기우스의 가르침처럼) 택함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유은총에 기인하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의 선구자인 세미-펠라기안주의

스미턴(Smeaton) 은 세미-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 가 알미니안주의의 선구자로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다음과 같은 진술로 보여주고 있다.

어거스틴이 펠라기안주의와의 논쟁에서 충분히 변증하고 그것을 비판했으므로 신자들은 더 이상 펠라기안주의를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회심을 위해 첫 걸음을 옮겨 놓을 만한 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힘이 성령의 도우심을 얻거나 혹은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새로운 사상체계가 일어났다. 캐시안(Cassian) 이 이 중도적 가르침의 주창자였는데, 그는 펠라기안주의와 어거스틴주의의 중간적인 입장에 서서 양쪽의 요소를 모두 취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세미-펠라기안주의라고 일컬어졌다. 그는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미친다는 것과 인간의 본성이 원죄에 의해 부패되었다는 사실까지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보편 은총의 체계와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유의지를 행사함으로 최종 결정을 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스미턴은 계속해서 캐시안을 추종한 사람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핵심적인 논리는 바로 이것이다. '기꺼이 믿고자 하는 것은 내가 소유한 부분이요, 돕는 부분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은총의 충족성을 주장한다. 여기에 더하여 그들은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에 따라 그 초대에 응하거나 기절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구원받기를 요청하시고 또한 똑같이 도우신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형성된 전체 체계는 오류와 진리의 요소를 동시에 담고 있으며, 종교개혁자들에 의한 은총의 교리가 부활된 이후 같은 방식으로 각양 교회로 퍼져 나간 알미니안주의의 사상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개혁신학인 칼빈주의

16세기의 종교개혁자 지도자들은 펠라기안주의와 세미-펠라기안 주의 모두를 비성경적이라는 근거로 거부했다. 로레인 뵈트너(L. Boettner) 가 보여주는 바대로 그들은 예정에 관해서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칼빈 이외에도 루터, 쯔빙글리, 멜랑톤, 불링거, 부서 등 종교개혁 시대의 모든 유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가르쳐졌다. 그들은 몇 부분에 있어서는 의견을 달리했지만 예정의 교리에 관해서는 견해가 일치했고 이 교리를 강조해서 가르쳤다. 실제로 루터는 그의 주요 저서하라고 할 수 있는 (The Bondage of the Will) 에서 칼빈만큼 이 교리에 집착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종교개혁 초기의 주도적인 모든 개신교 신학자들은 여기에 관해 똑같은 입장을 취했다. 물론 다른 면에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이 무기력한 것과 동시에 은총의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한다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하나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서서 까다로운 물음은 죄인들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인지, 하나님이 자신의 자유롭고 무조건적이며 저항할 수 없는 은총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이 믿음에 이르게 될 때 의롭게 하셔서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하시는 것인지,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과연 죄인들이 믿음에 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소생시키지는 성령을 통하여 죽음의 죄에서 그들을 일으키시는 분이지를 생각한 광범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은 단순히 칭의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믿음의 창조자이신가? 기독교는 과연 구원과 그에 관련되어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종교인가? 아니면 자력에 의존하고 자기 노력을 강조하는 종교인가? 등의 까다로운 문제가 있었다.

이와 같이 1619년에 도르트 회의에서 채택된 칼빈주의 5대 교리는 결코 새로운 신학체계가 아닌것이 확실하다. 반면에 윌리 박사(Dr. Willie) 는 다음과 같이 그 회에 대해서 말한다.

그 회의는 중대한 위기 시점에서 모인 것이었고, 종교계혁이 일어난 이후 두번째 세대에 세상에 나왔던 사상들이 체계와 진리의 본체를 조사하고 재검토 하여 다시 한번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1. 알미니안들이 그들의 5개조 교리를 항론의 형식으로 네덜란드에 정부에 제출하였기때문에 항론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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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개관

주제글 2011. 5. 17. 16:46

저   자 : 사도바울   

수신자 : 골로새교인들

시대적 배경

<골로새지역 :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는 브루기아(Phrygia) 지방의 도시로서 지금의 터키 남서부 지역에 해당합니다. 무역로 상에 있는 조그만 도시인 골로새에 세워진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것이 아니라 그가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행 19-20장)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1:7) 교회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에는 잡다한 신을 숭배하던 브루기아인들과 이곳에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교와 유대교적인 환경의 혼합종교의 특성 때문에 교회 안에 이단 사상이 들어와 복음을 왜곡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거짓철학(2:8), 율법주의(2:16), 천사숭배(2:18), 금욕주의(2:23) 이었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교회를 위협하고있는 이단적 가르침을 공격하고 사도적 선포를 변호하기 위하여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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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부터 12장 까지의 내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사 입다에 대한 글입니다. 사실 사사 입다에 대한 글은 아니고 10장 - 12장 까지의 대략적인 개관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기드온에서 바로 삼손으로 넘어가면서 그 사이에 있는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기에 글로 올립니다. PDF 파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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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면서 이제 그들에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약속을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민족과 언약을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된다. 이제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은 아브라함-이삭-야곱 으로 부터 이스라엘의 아들 12명으로 시작된 12지파, 즉 이스라엘 전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언약의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언약적 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사랑하심과 그들의 열조인 아브라함 - 이삭-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 (신명기 7장 6-8절)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을 애굽에서부터 인도하실것을 작정하셨지만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계획, 그리고 그들과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언약적 민족(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언약이 충실히 이행됨으로써 그들은 신명기적 정체성과 축복을 누릴 것이며 여호와 또한 그들에게 여호와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하여 약 400년 동안 머물게 되었는데, 요셉이 총리로 있었던 힉소스 왕조 이후에는 애굽을 위하여 강제노동에 사용된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압제는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가서 자식중 사내아이는 출생 즉시 나일강에 버려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건져내시어 가나안 곧 그들의 열조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신다.

열가지 재앙 이후 아무런 제재없이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자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에 이를 때까지 약 40년간을 광야에서 머물게 된다. 불과 수 주일이면 도착할 가나안에 가는 길이 이처럼 길어진 까닭은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고도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과 행동 때문이었다. (민수기 14장 26-35절) 이미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수백년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고센지방이라고 하는 외딴 지방이라고 할 지라도 그들에게는 당연히 애굽의 생활방식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에게 치명적인 것은 족장(야곱. 이스라엘)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여호와 신앙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의 성격은 단순히 압제 받는 민족에게 주어지는 해방의 기쁨, 혹은 부르짖는 자들을 향한 여호와의 긍휼하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방식(곧 예배를 의미한다)과 그럼으로서 보여질 언약의 신실성, 진정한 통치자이신 여호와의 통치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단지 이스라엘은 언약에 충실할 뿐 이니라 여호와께로부터 받는 사명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삶은 단순한 하나님의 징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과 자세를 갖추게 하는 준비기간이었음을 아울러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다" (신명기 8장 2-6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의 구원으로 택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자신의 나머지 삶에서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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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4:1-14

성전은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요, 건물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상징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하나님의 임재를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이었고, 삶의 중심이었으며,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이 있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고 하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이 것은 23장에서 계속되는 설명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된 행위를, 상석과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는 허영과 교만, 랍비라, 선생이라 지도자라 불리기를 좋아하는 교만, 겸손을 가장한 교만, 자신들 뿐 아니라 남들까지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하는 훼방꾼들에 불과한 것들을 비판하시는 것이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도 자신들의 욕심과 취향에 따라 바꾸어버리고, 겉으로는 십일조를 바치고 있지만 진심은 전혀 드리지 않고 있는 위선들, 겉은 깨끗해 보이지만 실상은 죽어서 부패하여 냄새가 나고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정확히 보시고 책망하시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렇게 성전을 빠져 나오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모든 실상들을 보지 않느냐?”

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돌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고 성전이 무너질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 껍데기, 사람들 앞에 나와서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하고 회개하는 것, 근채와 회향의 십일조를 내는 것. 거룩해 보이는 성전에 나와서 제사하는 것. 이것이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 제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다시말하면 이산이던 저산이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미혹거리 입니다. 금새 우리는 외형적이고 외식적인 종교생활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더욱 이러한 미혹과 유혹이 많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 때가 언제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때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외형적 사건으로는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도처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그 때에는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이 식어지게 될 것이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을 미혹케하는 것이 있을 텐데 주의하라”

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미혹도 심해지고, 환경적 어려움도 생기게 되고,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환란과 어려움들이 생기게 될 것이기 때문에 “미혹을 받지 말고, 끝까지 견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이 그에게 허락될”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낮이고 아직까지는 세상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밤이 될 것이고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을 때가 옵니다. 그때는 끝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 낮일 동안에는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분별력을 가지고 깨어서 죄악이 횡횡하고 미혹이 거세어지는 세상에서 승리하고 견디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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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소리를 높여 호산나
[각주:1] 외쳤던 그들... 그러나 그들은 불과 며칠 뒤에 흉포하게도 예수를 어찌하면 좋겠는지 물어보는 빌라도의 물음에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외친다.
그들이 외쳤던 '호산나'는 무엇인가? 자신들이 바랐던 '구원'은 무엇인가? 구원을 부르짖던 군중들은 폭도로 변하여 귀를 막고 피값을 자신과 후손들에게 돌리라고 발악하였다.
그들의 환호성과 외침을 들으며 주님은 진실로 간절하게 그들의 구원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지금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을 것이다.

비록 폭도로 변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이 외쳤던 '호산나'는 비록 당사자들에게는 소리에 불과하였겠지만[각주:2], 주님께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영혼의 절규로 들려졌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진정 '구원'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의미없는 외침을 전 우주를 뒤바꿔놓을 '의미'로 만드셨다. 주님은 폭도들의 저주의 외침보다 그들이 습관적으로 뱉은 구원의 외침에 응하셨고 기꺼이 십자가를 향하셨다.

환호성을 지르고 '호산나' 찬양을 하는 무리들을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 예루살렘을 소란스럽게 했던 그 분주함과 들뜸과는 별개로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지독하게 고독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를 따르는 어떤 자도 지금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그리스도의 진짜 목적은 이해하지 못했다.[각주:3]

소리 높여 '다윗의 자손 예수'를 찬양하는 자들은 불과 며칠 뒤 오히려 그를 향해 침을 뱉고 찢으며 죽일 터였다. 게다가 그의 12제자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들의 구주가 되시며 구원자(메시야)의 일을 하시려 하는지 알지 못하고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싸우게 될것이었다.[각주:4]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땅에 오신 순간부터 이겠지만, 지금 종려나무 가지들 사이로 지나가시는 이 장면은 너무나 고독하다. 실로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피조물, 자신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인 인간들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구원의 여정과 결심. 그리스도만이 바라보며 감당하시고자 하는 것은 완벽한 존재인 신으로서 그리스도만 경험하는 지독한 고독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본체이며, 완전히 만족하시고, 생명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가 죄인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송두리째 흔들며 두렵게[각주:5] 하였던 그 형벌을 완벽하게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그 고독, 이 환호하는 무리들 속에서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으리라.



  1. 호산나 - 아람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구약에는 여호와께 구원을 구하는 기도로서 시편 118편 25절에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로 나타나있다. 신약에는 종려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으로 나타나있고, 아이들이 성전 뜰에서 예수를 향하여 소리지른 기쁜 외침이다.(마 21:9, 15) [본문으로]
  2. 누가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에서는 '호산나'의 의미를 번역하지 않고 음역만 하였는데 이는 당시 단어가 의미의 변화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3. 비록 그들의 환영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무분별한 군중들의 환영을 구원의 기쁨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본문으로]
  4. 누가복음에는 최후의 만찬중에 제자들이 서로 높임을 받기 위해 다투는 장면이 있다. [본문으로]
  5. 막 14:33 - '심히 놀라다' 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두려워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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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소명

주제글 2011. 4. 7. 08:20

김희보(총신대 신대원 교수)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서 부터 시작된다. 창세기를 읽는 자는 누구나 그 안에서 인류의 3대 조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이요, 둘째는 홍수의 심판후 새 시대의 첫 조상이 되는 노아요, 세째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의 첫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이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가장 세밀하게 기록된 사건들은 그 세째번 부분이다.
    창세기는 전체가 50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전체의 3/4은(12장-50장) 아브라함과 그 가정 즉, 이삭과 야곱과 그 아들들에 관한 기록이다.
    이제 그러한 아브라함에 대하여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먼저는 그가 어떠한 시대, 어떠한 환경에서 부름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요, 다음은 그가 당한 첫 시험에 대해서이다.


    1. 아브라함의 시대와 환경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것은 바벨탐이 무너진 후 인간의 언어가 혼잡하게 흩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다. 성경의 연대를 살펴보면 노아의 연대가 주전 3,000년 전이요,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대가 된다. 그런데 그 뒤 중간 시대에 바벨탑을 쌓았던 기록이 있다. 이미 바벨탑 시대에 벌써 달과 별을 숭배 하는 우상종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고고학의 자료에 의하면 바벨탑이 무너진 후 가는곳 마다 작은 탑들을 쌓고 그 정상에는 월신(NANNA신)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었다. 이러한 탑들을 찌그랄(Ziggrat)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거룩한(혹은 높은) 제단이라는 말이다. 이런 것들을 미루어 생각해 본다 할지라도 아브라함 시대에는 벌써 우상 종교가 크게 성행했던 때였을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성경 여호수아 24:2에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하신 말씀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와 그 가정들은 열심히 우상을 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고고학의 다른 자료에도 주전 2,000년전 아브라함 시대의 문화와 더불어 그 때 벌써 우상 종교가 얼마나 성행하였던가를 보여주는 것들이 남아 있다. 그 중의 하나는 그 당시의 집터의 유적들이다.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 벌써 높은 바벨탑을 쌓으리만큼 그 당시의 건축술이 얼마나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아브라함 시대에도 건축기술은 상당히 발달하여 있었다.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발굴된 아브라함 시대(주전 2,000년전) 집터들의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그때의 집들은 벌써 구운 벽돌을 사용했었고 보통 집(가정)들은 2층이 없는데 10개 내지 20개의 크고 작은 방들이 있었다. 살림방들은 윗층에 있었고 부엌과 빨래터 같은 것들은 하층에 있었 는데 그 맨 뒷 방에는 반드시 우상의 제단을 둔 골방이 있었다. 이만큼 그들은 우상숭배에 열심이었다. 또 그 밖에도 당시 아이들이 배우던 학교터에서는 기하 학의 도형들과 토판에 새겨진 구구법과 그들의 상형문자들이 적혀 있었다.
    이 모든 자료들을 감정한 그 결론은, 즉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 지방의 문화는 그 시대에 벌써 상당한 수준에 있었고 그들의 물질생활의 수준도 유 복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영적으로는, 우상 종교의 암흑시대요 크게 부패한 시대였던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아브라함의 고향 땅의 이름 우르는 그 명칭 자체가 본래 빛 혹은 불이란 말로서 그것은 불을 숭배하는 우상종교의 의식에서 생겨진 말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어떠하든간에 앞서 인용한 여호수 아의 말만 보더라도 그 시대는 우상을 지극히 섬기던 타락한 시대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환경에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 시대가 전 혀 하나님을 모른 시대는 아니었다. 성경 연대를 잘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어린 시절에 노아는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 9:28에 기록된 대로 노아는 홍수 후에도 350년을 더 살았다고 했다. 노아시대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는 알았으나 그 하나님을 배반했던 것 같이 아브라함 시대도 그러했다.
    로마서 1:21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하신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배반한 시대였다.
    그러한 환경 중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다. 죄악이 관영했던 그 시대에 노아를 불러 방주를 짓게 하시던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브라함을 불 러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케 하셨던 것이다.


    2. 아브라함의 가나안 도착과 그의 첫 시험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아 하란을 떠날 때의 그 나이는 75세 였다 (창12:4).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벌써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갈 생각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도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어떠한 감화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창세기 11:31에 "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데라와 그 아내 사래가 조카 롯과 더불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가고자 하더니 도중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려 했으나 도중 하란에 머물고 만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 아버지 데라 때문 이었을 줄 안다.

    그는 육신의 아버지 때문에 가나안 땅과 고향 땅 우르의 중간 지점인 하란에서 망서린줄 안다. 늙은 아버지를 봉양할 것인가 버리고 갈 것인가. 이것은 그에게 큰 시험이 생겼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가. 오직 고요히 기다리며 기도할 뿐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루어 주신다. 비록 더디더라도 참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기다렸다. 드디어 때는 왔다.

    사도행전 7:4 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 (가나안) 으로 옮기셨느니 라" 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 그대로 하란에서 그 아버지 데라가 죽으므로 아브라함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희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셨다. 그런데 히브리 11:8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갈바를 알지 못하고 갔으며..." 했다. 여기에서 어떤 분은 의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는 분명히 하나님의[지시하는 땅] (가나안을 가리킴) 이라고 했었는데 히브리 기자는 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 갔다고 했을까? 그러나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말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가는 목적지가 가나안임은 분 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벌써 가나안으로 가려는 마음으로 하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가(창11:31 참고) 그러나 목적지가 분명하다고 해서 가는 길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느 방향으로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몰랐으나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그 길을 떠났던 것이다. 험준한 산을 넘어야 했고 깊은 강 (유브라데서)을 건너야 했다. 그러한 길을 그는 믿음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 믿음은 이루어져서 그는 드디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그러나 슬프다! 가나안 땅이 그를 기다리지는 않았다. 사도행전 7:5에 보면, "그러나 거기에서 발 붙일만큼도 유업을 그에게 주지 아니하시고... 했음을 본다.
    낯설은 그곳에 무서운 기근이 들었다. 살길이 막연했다. 문자 그대로 발 붙일곳이 없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닥친 큰 시험이었다. 그는 이 시험을 어떻게 이겼어야 했었을까. 오직 믿음으로 참고 견디며 기다렸어야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슬프게도 창12:10에 보면 "애굽으로 떠나갔다"고 했다.
    성경에 애굽이란 말이 여기에 맨 첫번 나온다. 애굽은 구약 성경에 흔히 혈육의 나라 우상의 나라로 대표된다. 그러므로 이사야 31:1에 보면 "도움을 받으려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내와 롯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다. 만일에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아니었더라면 (창12:17 참고) 그는 거기에서 아내를 잃어버렸던가 또는 자기의 생명을 잃었을 뻔 했었다.(창12:12-20 참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까지도 풍성케 했다.(창13:16) .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돌보심이 이러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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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설교하려고 작성한 글이라 꼭 두서없는 말투로 설교하듯이 글도 적었네요. 짧은 설교 시간에 너무 두서없이 이것 저것 말하다 보니까 크게 도움이 못되는 것 같아서 미처 설명하지 못한 부분들은 이곳에 글로써 남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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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거창한데, 특별히 사사기에서 메시야 사상에 대한 전형적인 전망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사기를 통해서 준비되는 이스라엘과 참 왕에 대한 전망은 볼 수 있다는 면에서 참고정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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