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4:1-14

성전은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요, 건물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상징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하나님의 임재를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이었고, 삶의 중심이었으며,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이 있는 한, 우리는 안전하다”고 하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이 것은 23장에서 계속되는 설명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된 행위를, 상석과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는 허영과 교만, 랍비라, 선생이라 지도자라 불리기를 좋아하는 교만, 겸손을 가장한 교만, 자신들 뿐 아니라 남들까지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하는 훼방꾼들에 불과한 것들을 비판하시는 것이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도 자신들의 욕심과 취향에 따라 바꾸어버리고, 겉으로는 십일조를 바치고 있지만 진심은 전혀 드리지 않고 있는 위선들, 겉은 깨끗해 보이지만 실상은 죽어서 부패하여 냄새가 나고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정확히 보시고 책망하시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렇게 성전을 빠져 나오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모든 실상들을 보지 않느냐?”

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돌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고 성전이 무너질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 껍데기, 사람들 앞에 나와서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하고 회개하는 것, 근채와 회향의 십일조를 내는 것. 거룩해 보이는 성전에 나와서 제사하는 것. 이것이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 제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다시말하면 이산이던 저산이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미혹거리 입니다. 금새 우리는 외형적이고 외식적인 종교생활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더욱 이러한 미혹과 유혹이 많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 때가 언제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때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외형적 사건으로는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도처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그 때에는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고, 서로 미워할 것이다”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이 식어지게 될 것이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을 미혹케하는 것이 있을 텐데 주의하라”

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미혹도 심해지고, 환경적 어려움도 생기게 되고,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환란과 어려움들이 생기게 될 것이기 때문에 “미혹을 받지 말고, 끝까지 견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이 그에게 허락될”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낮이고 아직까지는 세상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밤이 될 것이고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을 때가 옵니다. 그때는 끝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 낮일 동안에는 주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분별력을 가지고 깨어서 죄악이 횡횡하고 미혹이 거세어지는 세상에서 승리하고 견디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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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복음이다.

2011. 4. 16. 11:27
하나님이 복음이다(존 파이퍼)/IVP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슬프게도,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사랑관이 우리의 문화와 교회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이란 자신이 중시된다는 느낌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관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교육 철학-커리큘럼, 자녀 양육 기술, 동기 부여 전략, 치료 모델, 판매 기술-을 세운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이해할 때 자신이 중시된다는 느낌 외에 다른 것을 거의 생각할 수 없다. 당신이 나를 중시하지 않는다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하나님께 적용한다면, 그분의 가치는 약화되고 그분의 선하심은 훼손되며 우리의 궁극적인 만족은 사라져 버린다. 하나님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 사랑이 주는 궁극적인 최고의 선물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가장 큰 보화가 아니며, 그분이 자신을 내어 주신 것도 가장 큰 자비가 아니다. 죄인들이 자신의 창조자를 즐거워할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은 복음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며, 우리의 영혼은 그분을 넘어 다른 곳에서 만족을 구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자화자찬self-admiration 에 대한 인정으로 왜곡하는 과정은 아주 미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행하는 대부분의 종교 행위에 은밀하게 침투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 때문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사랑이 그분이 우리를 중시하신다는 근거라면, 실제로 누가 찬양을 받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 중심적이신 한 기꺼이 하나님 중심적이 되려는 것 같다. 우리는 십자가가 우리의 가치에 대한 증거인 한 기꺼이 십자가를 자랑하려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랑과 기쁨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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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암셋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쫓겨났다(출 12; 민 33:5).
2. 숙곳 히브리 민족이 이 첫 야영지를 떠난 후에 주께서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다(출 13:20~22).
3. 비하히롯 이스라엘이 홍해를 통과하였다(출 14; 민 33:8).
4. 마라 주께서 마라의 물을 고치셨다(출 15:23~26).
5. 엘림 이스라엘이 열두 샘가에 천막을 쳤다(출 15:27).
6. 신 광야 주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먹이셨다(출 16).
7. 르비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웠다(출 17:8~16).
8. 시내 산(호렙 산 또는 예벨무사) 주께서 십계명을 계시해 주셨다(출 19~20).
9. 시내 광야 이스라엘이 성막을 지었다(출 25~30).
10. 광야에서의 진영 모세를 도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하여 장로 칠십인이 부름을 받았다(민 11:16~17).
11. 에시온게벨 이스라엘이 에서와 암몬의 땅을 평화롭게 통과하였다(신 2).
12. 가데스바네아 모세가 약속의 땅에 정탐꾼들을 보냈다. 이스라엘이 거역하였고 그 땅에 들어가는 데 실패하였다. 가데스는 여러 해 동안 이스라엘의 주 진영 구실을 하였다(민 13:1~3,17~33; 14; 32:8; 신 2:14).
13. 동쪽 광야 이스라엘은 에돔하고 모압과 더불어 싸우기를 피하였다(민 20:14~21; 22~24).
14. 아르논 강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아모리 족속을 멸하였다(신 2:24~37).
15. 느보 산 모세가 약속된 땅을 바라보았다(신 34:1~4). 모세가 그의 마지막 세 가지 설교를 전하였다(신 1~32).
16. 모압 평지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나눌 것과 그 주민을 쫓아낼 것을 말씀하셨다(민 33: 50~56).
17. 요단 강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요단 강을 건넜다. 길갈 근처에 요단 강 바닥에서 가져온 돌로 요단 강이 갈라졌던 것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수 3~5:1).
18. 여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하였다(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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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소리를 높여 호산나
[각주:1] 외쳤던 그들... 그러나 그들은 불과 며칠 뒤에 흉포하게도 예수를 어찌하면 좋겠는지 물어보는 빌라도의 물음에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라고 외친다.
그들이 외쳤던 '호산나'는 무엇인가? 자신들이 바랐던 '구원'은 무엇인가? 구원을 부르짖던 군중들은 폭도로 변하여 귀를 막고 피값을 자신과 후손들에게 돌리라고 발악하였다.
그들의 환호성과 외침을 들으며 주님은 진실로 간절하게 그들의 구원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지금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을 것이다.

비록 폭도로 변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이 외쳤던 '호산나'는 비록 당사자들에게는 소리에 불과하였겠지만[각주:2], 주님께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영혼의 절규로 들려졌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진정 '구원'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의미없는 외침을 전 우주를 뒤바꿔놓을 '의미'로 만드셨다. 주님은 폭도들의 저주의 외침보다 그들이 습관적으로 뱉은 구원의 외침에 응하셨고 기꺼이 십자가를 향하셨다.

환호성을 지르고 '호산나' 찬양을 하는 무리들을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 예루살렘을 소란스럽게 했던 그 분주함과 들뜸과는 별개로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지독하게 고독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를 따르는 어떤 자도 지금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그리스도의 진짜 목적은 이해하지 못했다.[각주:3]

소리 높여 '다윗의 자손 예수'를 찬양하는 자들은 불과 며칠 뒤 오히려 그를 향해 침을 뱉고 찢으며 죽일 터였다. 게다가 그의 12제자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들의 구주가 되시며 구원자(메시야)의 일을 하시려 하는지 알지 못하고 서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싸우게 될것이었다.[각주:4]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땅에 오신 순간부터 이겠지만, 지금 종려나무 가지들 사이로 지나가시는 이 장면은 너무나 고독하다. 실로 고난이 시작된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피조물, 자신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인 인간들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구원의 여정과 결심. 그리스도만이 바라보며 감당하시고자 하는 것은 완벽한 존재인 신으로서 그리스도만 경험하는 지독한 고독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본체이며, 완전히 만족하시고, 생명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가 죄인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송두리째 흔들며 두렵게[각주:5] 하였던 그 형벌을 완벽하게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그 고독, 이 환호하는 무리들 속에서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으리라.



  1. 호산나 - 아람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구약에는 여호와께 구원을 구하는 기도로서 시편 118편 25절에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로 나타나있다. 신약에는 종려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으로 나타나있고, 아이들이 성전 뜰에서 예수를 향하여 소리지른 기쁜 외침이다.(마 21:9, 15) [본문으로]
  2. 누가복음을 제외한 세 복음서에서는 '호산나'의 의미를 번역하지 않고 음역만 하였는데 이는 당시 단어가 의미의 변화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3. 비록 그들의 환영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감사하고 축하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무분별한 군중들의 환영을 구원의 기쁨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본문으로]
  4. 누가복음에는 최후의 만찬중에 제자들이 서로 높임을 받기 위해 다투는 장면이 있다. [본문으로]
  5. 막 14:33 - '심히 놀라다' 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두려워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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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소명

주제글 2011. 4. 7. 08:20

김희보(총신대 신대원 교수)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서 부터 시작된다. 창세기를 읽는 자는 누구나 그 안에서 인류의 3대 조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이요, 둘째는 홍수의 심판후 새 시대의 첫 조상이 되는 노아요, 세째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의 첫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이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가장 세밀하게 기록된 사건들은 그 세째번 부분이다.
    창세기는 전체가 50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전체의 3/4은(12장-50장) 아브라함과 그 가정 즉, 이삭과 야곱과 그 아들들에 관한 기록이다.
    이제 그러한 아브라함에 대하여 두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먼저는 그가 어떠한 시대, 어떠한 환경에서 부름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요, 다음은 그가 당한 첫 시험에 대해서이다.


    1. 아브라함의 시대와 환경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것은 바벨탐이 무너진 후 인간의 언어가 혼잡하게 흩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다. 성경의 연대를 살펴보면 노아의 연대가 주전 3,000년 전이요,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대가 된다. 그런데 그 뒤 중간 시대에 바벨탑을 쌓았던 기록이 있다. 이미 바벨탑 시대에 벌써 달과 별을 숭배 하는 우상종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고고학의 자료에 의하면 바벨탑이 무너진 후 가는곳 마다 작은 탑들을 쌓고 그 정상에는 월신(NANNA신)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었다. 이러한 탑들을 찌그랄(Ziggrat)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거룩한(혹은 높은) 제단이라는 말이다. 이런 것들을 미루어 생각해 본다 할지라도 아브라함 시대에는 벌써 우상 종교가 크게 성행했던 때였을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성경 여호수아 24:2에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하신 말씀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와 그 가정들은 열심히 우상을 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고고학의 다른 자료에도 주전 2,000년전 아브라함 시대의 문화와 더불어 그 때 벌써 우상 종교가 얼마나 성행하였던가를 보여주는 것들이 남아 있다. 그 중의 하나는 그 당시의 집터의 유적들이다.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 벌써 높은 바벨탑을 쌓으리만큼 그 당시의 건축술이 얼마나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아브라함 시대에도 건축기술은 상당히 발달하여 있었다.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발굴된 아브라함 시대(주전 2,000년전) 집터들의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그때의 집들은 벌써 구운 벽돌을 사용했었고 보통 집(가정)들은 2층이 없는데 10개 내지 20개의 크고 작은 방들이 있었다. 살림방들은 윗층에 있었고 부엌과 빨래터 같은 것들은 하층에 있었 는데 그 맨 뒷 방에는 반드시 우상의 제단을 둔 골방이 있었다. 이만큼 그들은 우상숭배에 열심이었다. 또 그 밖에도 당시 아이들이 배우던 학교터에서는 기하 학의 도형들과 토판에 새겨진 구구법과 그들의 상형문자들이 적혀 있었다.
    이 모든 자료들을 감정한 그 결론은, 즉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 지방의 문화는 그 시대에 벌써 상당한 수준에 있었고 그들의 물질생활의 수준도 유 복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영적으로는, 우상 종교의 암흑시대요 크게 부패한 시대였던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아브라함의 고향 땅의 이름 우르는 그 명칭 자체가 본래 빛 혹은 불이란 말로서 그것은 불을 숭배하는 우상종교의 의식에서 생겨진 말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어떠하든간에 앞서 인용한 여호수 아의 말만 보더라도 그 시대는 우상을 지극히 섬기던 타락한 시대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환경에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 시대가 전 혀 하나님을 모른 시대는 아니었다. 성경 연대를 잘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어린 시절에 노아는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 9:28에 기록된 대로 노아는 홍수 후에도 350년을 더 살았다고 했다. 노아시대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는 알았으나 그 하나님을 배반했던 것 같이 아브라함 시대도 그러했다.
    로마서 1:21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하신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배반한 시대였다.
    그러한 환경 중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다. 죄악이 관영했던 그 시대에 노아를 불러 방주를 짓게 하시던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브라함을 불 러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케 하셨던 것이다.


    2. 아브라함의 가나안 도착과 그의 첫 시험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아 하란을 떠날 때의 그 나이는 75세 였다 (창12:4).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벌써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갈 생각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도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어떠한 감화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창세기 11:31에 "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데라와 그 아내 사래가 조카 롯과 더불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가고자 하더니 도중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려 했으나 도중 하란에 머물고 만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 아버지 데라 때문 이었을 줄 안다.

    그는 육신의 아버지 때문에 가나안 땅과 고향 땅 우르의 중간 지점인 하란에서 망서린줄 안다. 늙은 아버지를 봉양할 것인가 버리고 갈 것인가. 이것은 그에게 큰 시험이 생겼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가. 오직 고요히 기다리며 기도할 뿐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루어 주신다. 비록 더디더라도 참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기다렸다. 드디어 때는 왔다.

    사도행전 7:4 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 (가나안) 으로 옮기셨느니 라" 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 그대로 하란에서 그 아버지 데라가 죽으므로 아브라함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희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셨다. 그런데 히브리 11:8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갈바를 알지 못하고 갔으며..." 했다. 여기에서 어떤 분은 의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는 분명히 하나님의[지시하는 땅] (가나안을 가리킴) 이라고 했었는데 히브리 기자는 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 갔다고 했을까? 그러나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말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가는 목적지가 가나안임은 분 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벌써 가나안으로 가려는 마음으로 하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가(창11:31 참고) 그러나 목적지가 분명하다고 해서 가는 길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느 방향으로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몰랐으나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그 길을 떠났던 것이다. 험준한 산을 넘어야 했고 깊은 강 (유브라데서)을 건너야 했다. 그러한 길을 그는 믿음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 믿음은 이루어져서 그는 드디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그러나 슬프다! 가나안 땅이 그를 기다리지는 않았다. 사도행전 7:5에 보면, "그러나 거기에서 발 붙일만큼도 유업을 그에게 주지 아니하시고... 했음을 본다.
    낯설은 그곳에 무서운 기근이 들었다. 살길이 막연했다. 문자 그대로 발 붙일곳이 없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닥친 큰 시험이었다. 그는 이 시험을 어떻게 이겼어야 했었을까. 오직 믿음으로 참고 견디며 기다렸어야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슬프게도 창12:10에 보면 "애굽으로 떠나갔다"고 했다.
    성경에 애굽이란 말이 여기에 맨 첫번 나온다. 애굽은 구약 성경에 흔히 혈육의 나라 우상의 나라로 대표된다. 그러므로 이사야 31:1에 보면 "도움을 받으려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내와 롯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다. 만일에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아니었더라면 (창12:17 참고) 그는 거기에서 아내를 잃어버렸던가 또는 자기의 생명을 잃었을 뻔 했었다.(창12:12-20 참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까지도 풍성케 했다.(창13:16) .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돌보심이 이러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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