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 1: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골로새서는 골로새 지역에 있는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그 편지의 수신자들을 언급할때 바울사도는 당연히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수신인을 골로새에 있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로 말하면서 그들이 이 땅에 속한 자이나 또한,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닌 존재의 두 영역을 소개합니다. 성도는 세상을 살 때 항상 이와 같이 존재의 두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인이라는 신분은 한시적이고 가변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하늘 시민권은 영원히 바뀔 수 없는 신분입니다. 그러므로 불변하는 하늘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바울사도는 이 골로새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이라고 보충 설명을 합니다. “신실한” 이란 수식어는 그들의 삶을 가다듬게 하고 용기를 부여하는 말입니다. 이방신과 그 풍습이 만연한 골로새에서 소수집단인 “성도”들은 늘 사회적인 압력을 받는 자들 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며 증거하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하는 압력이 그곳에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도”들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해야 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그들을 향한 주님의 수준 높은 부름에 신실하게 반응해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성도들을 끝까지 신실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까?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확신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 이라고 불리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형제들과의 사귐은 골로새 같은 소읍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도움과 격려가 되지만 그들 모두 끝까지 신앙으로 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 후에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는 비슷한 내용의 인사말을 이어갑니다. 그것은 “은혜와 평강” 이라는 표현입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자발적인 호의입니다. 주님의 호의를 입은 자의 삶 속에 부어진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이 받을 자격조차 없는 인간에게 부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있을지어다” 는 단순한 인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기도가 되고 있습니다.


은혜를 기원하는 기도에 평강이 결합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인사 “샬롬”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은 자들이 그 삶속에 궁극적으로 누리는 축복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누리게 되는 복을 한마디로 말하면 샬롬이라는 것입니다. 평강은 특히 관계의 축복을 비는 말로서 사람들 사이의 평강이요,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평강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과 더불어 누리는 평강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자신과 더불어 화목한 상태, 그것이 평강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와 평강의 출처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그 결과는 평강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16) 만약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 유대인, 하나님 사이에 평강을 가지고 오는 복음이라고 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그 평강이 어디에서 확인되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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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언약

주제글 2011. 5. 31. 11:40


언약적 관점에서 다윗언약의 수립은 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잘 드러내 주며, 동시에 ‘메시야적 왕권’ 을 전형적으로 예언하였다. 히브리인들의 메시야 기대 사상은 규범적으로 다윗왕가와 연관을 맺고 있다. 하나님 자신은 그의 왕권을 다윗의 왕권과 연결하신다.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왕국이 오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언약은 그의 백성가운데 하나님의 왕국이 오는 공식적인 약정으로서 기여한다.
이러한 다윗 언약의 골자는, 다윗이 주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으려는 소원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응답으로 주신, 나단 선지자의 말 가운데 나타나 있다. 이제 다윗 언약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 후, 중심되는 요소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삼하 7:11b-17 의 약속

나단 선지를 통해서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삼하 7:11b-17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단의 예언은 다윗 왕가의 영속성에 대한 종교적 허가라 할 수 있으며 이 종교적 허가는 언약이라는 틀 속에서 구속에 대한 보충적 확증이기도 하다. 이 구절들에서 비록 언약이라는 단어를 찾을 수는 없으나, 구절내의 구조, 즉 역사적 서문(8), 핵심내용을 담은 규정(16) 등과 시 89:3-4은 이 약속을 언약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음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출을 열망하는 다윗의 소원을 유보시키며(1-7), 대신 다윗 당대의 안정과 번영(8-11a), 다윗왕의 후손들에 의해 영원히 이어지는 다윗왕조(11b-17)를 약속하신다. 혹 그들이 범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실지언정 버리시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14-16, 시 89:30-37). 따라서 이 약속은 다윗을 좇아나며 그가 이룩한 왕국을 통치하게 될 열왕의 혈통을 완전하게 보장하였다.

2. 언약의 중재자로서의 왕

왕정 수립 이후 이스라엘의 왕은 언약과 관련하여 독특한 역할을 유지한다. 즉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더욱이 왕은 백성들과의 언약을 중재한다. 언약의 중재자로서 왕은 백성 앞에서 언약의 주로서의 권위의 하나님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대표한다. 이러한 언약 중재자의 이중 책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치와도 관련되는 것으로서(14), 이런 왕의 역할이 실제로 다윗 언약의 중요한 면이 된다.

3. 언약의 신실성과 최종실현/메시야

다윗 언약은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성을 강조한다. 즉 왕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14). 여기서 나타내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다윗 왕국은 하나님에 의해 탄생된 나라라는 다윗 왕국의 기원을 말해주며, 둘째로, 범죄해도 징계로써 회개케하는 사랑으로 연합된 관계임을 주목하게 하고, 셋째로, 상속의 관계로서 영원한 기업을 물려받은 다윗왕국이 멸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성의 강조와 더불어 다윗 언약은 다윗의 후손들이 영원히 이스라엘의 보좌위에 앉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 약속에 의해서 다윗왕조는-북이스라엘 왕조와는 생생하게 대조되게-400년 이상(B.C. 1010-586) 지속되었다. 열왕기서에 기록된 다윗왕조의 역사는 이 사실을 강조해준다(왕상 11:13; 32; 34; 36, 15:4, 왕하 8:19; 34, 20:6 등). 하지만 왕조는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므낫세의 죄악(왕하 21장)을 기점으로 해서 요시야의 개혁에도 불구하고(왕하 23) 하나님은 유다를 버리신다(왕하 23:27).


그러면 언약의 신실성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구약 역사에서 다윗의 왕위 계승이 끊어진 것은 이스라엘 왕권의 예언적인 역할이라는 말로 평가될 수 있다. 즉 다윗의 통치는 다윗 왕권과 하나님의 왕권을 최종적으로 통합하는 메시야적 구원자의 실재를 그림자 형태로 예언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윗의 혈통에서 난 메시야는 언약의 최종 실현으로 언약적 신실성은 지켜지게 되는 것이다. 한 영원한 통치자를 그리고 있는,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시 2:7에 다시 언급되며, 여러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서 언약적 신실성은 강조되어진다(암 9:11, 호 3:5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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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의 메시지는 대부분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고집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메시야적 메시지가 두드러진 한 부분이라면 이스라엘의 필요와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들으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는 것 - 메시야적 중요성(의미) - 라는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첫째,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언급(삿 2:1-5)은 여호와의 임재가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호와의 사자의 모습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두 가지 이다. (1)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결코 깨뜨리지지 않으실 것이다.(언약 중재자. 곧 육체를 입고 오시는 메시야가 확실하게 이렇게 말했다) (2) 이스라엘의 고의적인 언약 파괴로 인해 언약의 조항들에 담긴 저주가 실행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멸망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약속받은 기업에서 완전한 “구원”을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재판관으로서 이렇게 말했다.

둘째, 왕권 개념이 백성들 앞에 주어졌다. 여호와께서 세우셨고 성령이 그 위에 임한 사사들은 자신들의 인성과행동들 속에서 족장들과 모세와여호수아 시대에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되고 표현되었던 메시야적 왕권을 얼마간 나타내 보였다.

셋째,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우 구해내고 이들이 여호와를 섬기며 살 수 있도록 자유를 회복시켜주는 임들이, 다시 말해 넓은 의미에의 메시야 개념에서 중요한 측면들인 임무들이 수행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메시야 개념이 계시되었고 메시야 사역이 수행되었다.

넷째, 어떤 학자들은 사사기의 가장 큰 공헌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해 왔으며, 이러한 지적은 올바른 것이었다. 즉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임재하고 활동하는(임마누엘의 원칙이라는 의미에서) 메시야를 항상 필요로 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 땅의 모든 유익들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들은 순종하는 왕적 종은 물론이고 성별된 제사장과 성실한 선지자적 목소리가 절실히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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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메랄다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 D. 스틸, C. 토머스 / 엠마오" 에서 요약 발췌하였습니다

알미니안파의 항의

1610년 네덜란드에서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제임스 알미니우스가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1년 후에 그의 가르침을 근거로 해서 그의 추종자들이 5개의 신앙조항을 작성하였다. 알미니안 - 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 - 들은 그들이 작성한 신앙에 대한 5개조의 교리를 네덜란드 정부에 제출했다. [각주:1]

알미니안들은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으로 변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전적 무능, 무저건적 선택 혹은 예정, 특별한 구속, 불가항력적인 은총, 성도의 견인에 관한 교리들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들은 위와 같은 내용들에 대한 네덜란드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변경되기를 원했다.

알미니안주의의 철학적 근거

제임스 패커는 알미니안파 속에 형성된 사상체계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것이(역사 속에 알미니안주의로 알려진) 가지고 있는 신학은 두 가지 철학적 원리에 기초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은 인간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어서 인간의 책임과도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능력(ability)은 의무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들로부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추론을 이끌어 냈다. 첫째 성경은 믿음을 자유롭고도 책임을 져야만 할 행위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믿음은 하나님에게 원인을 두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해서 인간이 독립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성경은 믿음을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할 의무라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보편적인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추론을 통해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경이 다음과 같은 입장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결코 완전히 부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이 자신 앞에 놓여질 때 그것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2.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므로 그것을(복음을) 거부할 수도 있다.
  3. 구원 얻을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그들이 스스로 가지는 믿음에 따라서 이루어질 것임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의해 촉진되어진다.
  4.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사람의 구원을 완전하게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 믿음을 보장해 주는 그러한 선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각 사람을 위한 구원의 가능성을 창조한 것일 따름이다.
  5. 믿음을 지키고 은총의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있는 관건은 신자들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러므로 실패하는 자들은 유기 된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구원하는 믿음은 자기 안에 계시는 하나님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로 간주된다.

도르트회의

1618년 알미니우스의 입장을 검토해 보기 위하여 도르트에서 국제적인 종교회의가 소집되었다. 그 회에는 84명의 회원이 참가한 것 외에도 18명의 정부에서 나온 위원들이 참석했고 독일, 신성로마제국, 스위스 및 영국으로부터 온 27명의 대표도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개월 동안 모두 154회의 회의가 열렸고, 마지막 회의는 1619년 5월 9일 이었다. 워버튼(Warburton)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 총회는 항론파가 발전시킨 5대 교리에 대해서 세밀하게 검토하면서 그들의 가르침을 성경의 증언과 상호 비교하였다. 그곳에 참석한 회원들은 항론파가 믿음의 법칙으로 유일하게 수용한다고 명확하게 밝히면서 선포했던 가르침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되지 않음을 보고, 그것을 만장일치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 총회에 참석한 회원들은 단순한 기각은 충분하지 못한 것이라 보고, 논의 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칼빈주의적인 참다운 가르침을 밝히는 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칼빈주의적 입장을 5개의 장으로 구체화시켜 밝혔는데 이것을 칼빈주의 5대 교리라 부른다.




칼빈주의 5대 교리와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의 상호비교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

칼빈주의 5대 교리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

비록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영향을 받았지만 인간의 영적 상태가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처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모든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게도 하시고 믿게도 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신다.

죄인은 각각 자유의 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의 영원한 운명은 그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간의 자유는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그의 녕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의지는 그의 죄된 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죄인은 각자 하나님의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을 얻거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여 멸망에도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기된 죄인은 성령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자신이 믿기 전에 성령에 의하여 중생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믿음은 인간의 행위이고 새 생명으로 탄생하는 일에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구원 얻는 일에 공헌할 수 있다.

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에 이르는 어떤 사람들을 선태하신 근거는 그들이 하나님ㅇ 븨루스임ㅔ 응답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유롭게 복음을 선택하여 믿음을 가진 자들을 미리 아시고 그들만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선택은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지고 또 제약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선택의 근거로 삼으시는 믿음이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죄인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인간 의지의 결과일 따름이다. 아떤 사람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되는 선택 역시 그러하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선택할 자들을 미리아시고 그들을 택하셨다. 결국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보편 구속 혹은 일반 속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받는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의 구원을 실제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과 각 사람들을 위해서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그를 믿는 자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인들을 용서하는 일에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믿는다는 구원의 조건이 있으므로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물리치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선택을 하는 조건에서만 효과적이다.

성령은 효과적으로 거부될 수 있다

성령은 복음의 초청에 의해 외적으로 부름을 입은 자들을 내적으로 부르신다. 성령은 죄인들이 구원 얻기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가 자유한 만큼 성공적으로 성령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있다. 성령은 죄인이 믿지 않는 한 중생시킬 수 없다. 즉 믿음(인간이 공헌하는 부분)이 선행해야만 중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함에 있어서 성령을 제한한다. 성령은 그와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자들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다.

죄인이 응답하기 전에는 성령께서 생명을 주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거부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 의하여 거부될 수 있고 방해받을 수도 있으며, 또한 종종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은혜로부터의 타락

믿고 진실로 구원을 얻는 자들도 믿음과 그 이외의 것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

모든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 점에 대해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고 주장하는데 결국 죄인이 한번 거듭나게 되면 그는 결코 유기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알미니안에 의하면 :

구원은 (주도권을 가지신) 하나님과 (반드시 응답해야만 하는) 인간의 노력이 결합됨으로써 완성된다.

여기서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구원을 제공하셨지만, 그의 구원에 대한 준비는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협력할 것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은총의 제안을 받아 들이는 자에게만 효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인 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구원의 선물을 받을 자를 결정하게 된다.

※ 도르트 총회에서 거부됨 :

(비록 이러한 순서로 나열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항론"(Remonstrance)에 담겨진 사상의 체계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것을 1610년 네덜란드 교회에 제출하였고, 이것은 1619년 비성경적이라는 이유로 도르트 총회에서 거부되었다.

전적 무능력 혹은 전적 부패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기 위해 복음을 믿는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력해졌다.

죄인은 하나님의 일들엘 관해서는 죽었고, 눈이 멀었으며 듣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의 마음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고 전적으로 부패해 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하지 못하며 그것은 그의 악한 본성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죄인된 인간은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악에 대하여 선을 택하지 않으며 사실은 할 수도 없는 상태이다.

결국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의 사역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성령의 다시살게 하심과 새로운 본성을 주시는 사역에 의해 죄인은 중생하게 된다.

믿음은 인간이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믿음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지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물은 아닌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구원을 목적으로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은 오직 그의 주권적인 의지에 근거하는 것이다.

특정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결코 죄인이 가지는 믿음이나 회개등과 같은 미리 알 수 있는(예지할 수 있는) 반응에 의한 것이거나 인간의 순종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가 선택하신 각 사람에게 믿음과 회개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결국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가지는 어떤 덕이나 예지할 수 있는 행위에 근거해서 결정되거나 제약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한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인 원인은 죄인이 그리스도를 택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시는 것에 있다.

특별 구속 혹은 제한 구속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피택자들만 구원하려는 것으로써 실제적으로 그들만의 구원을 보장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어떤 특정한 죄인들을 대신해서 당하신 형벌로써 대속의 인내였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시는 것과 더불어 자신에게 그들을 연합시키시는 일은 물론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보장한다.

믿음의 은총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 주신 모든 자들에게 골고루 적용되며, 따라서 그들의 구원은 확실하게 확증된다.

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 혹은 거부할 수 없는 은총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구원의 외적 부르심에 더하여 성령께서는 택함받은 자들을 향해 반드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지속해서 모든 사역을 하신다.

외적 소명(모든 사람들에게 구별없이 하시는 소명)은 거부될 수도 있고 종종 그렇게 된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적 소명(오직 택한 자만을 부르시는 소명)은 거부될 수 없다. 성령의 내적 소명은 인간을 항상 회개로 초대한다. 이런 특별한 소명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성령께서는 구원을 적용시키심에 있어서 결코 인간의 의지에 제한받지 않으시며, 구원의 성공에 있어서도 결단코 인간과 협동하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그의 은혜로 택함받은 죄인을 협력하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며, 자유롭고 기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오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은혜가 미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구원이 이루어진다.

성도의 견인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고,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으며, 성령에 의해 믿음을 부여받은 모든 자들은 영원히 구원을 받게 된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을 유지하며, 그 결과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다.

※ 칼빈주의에 의하면 :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해 성취된다. 아버지는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아들은 그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성령은 택한 자들을 믿음과 회개에 이르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효과 있게 만드셨다. 또한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복음에 기꺼이 순종하게 하셨다.

모든 과정(선택, 구속, 중생)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의 은총을 받을 자를 결정하신다.

※ 도르트 총회에서 재확인됨 :

이 신학체계는 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성경에 담긴 구원의 교리로서 재확인 되었다.

이 체계는 당시에 "5대 교리"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제출한 5대 교리에 상응하는 대답을 하기 위해) 로 형성되었고, 이때 이후로 "칼빈주의 5대 교리" 로 알려지게 되었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

존 칼빈이나 제임스 알미니우스의 이름이 붙은 두 체계는, 그들 스스로 그 기본적인 개념을 만든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래 전에 이미 만들어진 것들이다. 각 체계의 기본적인 원리는 이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전인 수세기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예를 들어 칼빈이 지닌 기본적인 교리들의 입장은 이미 주후 5세기에 펠라기우스(Pelagius) 와 논쟁한 어거스틴(Augustine) 이 옹호한 것들이다. 커닝햄(Cunningham) 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칼빈의 칼빈주의 속에 그 본질상 아무런 새로운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알미니우스의 알미니안주의 속에도 새로운 것이 없다... 알미니우스의 교리들은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Clemens Alexandrinus) 시대 정도로 되돌아 가서 3~4 세기에 있었던 교부들의 수많은 논쟁들 속에서 이미 주장되어 졌으며, 당시의 부패한 세속철학의 영향을 받은 교회 속에 널리 유포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5세기의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알미니우스보다 건전한 교리로부터 더 이탈한 것은 사실이지만, 명확한 것은 알미니우스 처럼 칼빈주의를 반대했다는 점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본성이 죄로 말미암아 부패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는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 생긴 악한 영향은 그의 자손에게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펠라기우스는 모든 어린아이는 아담이 타락 전에 가졌던 것과 똑같은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이런한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상은 인간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자유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안에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지키고 복음을 믿을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가진다고 보았다.

한편 어거스틴은 인간의 본성이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했기 때문에 누구도 자기 스스로 율법이나 복음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주장했다ㄷ. 그는 신적인 은총은 죄인들이 믿고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며, 이 은총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영생할 수 있다록 예정하신 사람에게만 국한되게 미친다고 주장했다. 결국 믿음의 행위는 죄인이 가지는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펠라기우스의 가르침처럼) 택함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유은총에 기인하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의 선구자인 세미-펠라기안주의

스미턴(Smeaton) 은 세미-펠라기안주의(Semi-Pelagianism) 가 알미니안주의의 선구자로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다음과 같은 진술로 보여주고 있다.

어거스틴이 펠라기안주의와의 논쟁에서 충분히 변증하고 그것을 비판했으므로 신자들은 더 이상 펠라기안주의를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회심을 위해 첫 걸음을 옮겨 놓을 만한 자연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힘이 성령의 도우심을 얻거나 혹은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새로운 사상체계가 일어났다. 캐시안(Cassian) 이 이 중도적 가르침의 주창자였는데, 그는 펠라기안주의와 어거스틴주의의 중간적인 입장에 서서 양쪽의 요소를 모두 취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세미-펠라기안주의라고 일컬어졌다. 그는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미친다는 것과 인간의 본성이 원죄에 의해 부패되었다는 사실까지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 반면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한다는 보편 은총의 체계와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유의지를 행사함으로 최종 결정을 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스미턴은 계속해서 캐시안을 추종한 사람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핵심적인 논리는 바로 이것이다. '기꺼이 믿고자 하는 것은 내가 소유한 부분이요, 돕는 부분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은총의 충족성을 주장한다. 여기에 더하여 그들은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지에 따라 그 초대에 응하거나 기절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게 구원받기를 요청하시고 또한 똑같이 도우신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형성된 전체 체계는 오류와 진리의 요소를 동시에 담고 있으며, 종교개혁자들에 의한 은총의 교리가 부활된 이후 같은 방식으로 각양 교회로 퍼져 나간 알미니안주의의 사상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개혁신학인 칼빈주의

16세기의 종교개혁자 지도자들은 펠라기안주의와 세미-펠라기안 주의 모두를 비성경적이라는 근거로 거부했다. 로레인 뵈트너(L. Boettner) 가 보여주는 바대로 그들은 예정에 관해서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칼빈 이외에도 루터, 쯔빙글리, 멜랑톤, 불링거, 부서 등 종교개혁 시대의 모든 유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가르쳐졌다. 그들은 몇 부분에 있어서는 의견을 달리했지만 예정의 교리에 관해서는 견해가 일치했고 이 교리를 강조해서 가르쳤다. 실제로 루터는 그의 주요 저서하라고 할 수 있는 (The Bondage of the Will) 에서 칼빈만큼 이 교리에 집착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종교개혁 초기의 주도적인 모든 개신교 신학자들은 여기에 관해 똑같은 입장을 취했다. 물론 다른 면에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이 무기력한 것과 동시에 은총의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한다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하나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서서 까다로운 물음은 죄인들이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인지, 하나님이 자신의 자유롭고 무조건적이며 저항할 수 없는 은총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이 믿음에 이르게 될 때 의롭게 하셔서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하시는 것인지,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과연 죄인들이 믿음에 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소생시키지는 성령을 통하여 죽음의 죄에서 그들을 일으키시는 분이지를 생각한 광범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은 단순히 칭의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믿음의 창조자이신가? 기독교는 과연 구원과 그에 관련되어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종교인가? 아니면 자력에 의존하고 자기 노력을 강조하는 종교인가? 등의 까다로운 문제가 있었다.

이와 같이 1619년에 도르트 회의에서 채택된 칼빈주의 5대 교리는 결코 새로운 신학체계가 아닌것이 확실하다. 반면에 윌리 박사(Dr. Willie) 는 다음과 같이 그 회에 대해서 말한다.

그 회의는 중대한 위기 시점에서 모인 것이었고, 종교계혁이 일어난 이후 두번째 세대에 세상에 나왔던 사상들이 체계와 진리의 본체를 조사하고 재검토 하여 다시 한번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1. 알미니안들이 그들의 5개조 교리를 항론의 형식으로 네덜란드에 정부에 제출하였기때문에 항론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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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본질

2011. 5. 24. 15:13

역자서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아는 자요, 그를 아는 자는 그와 한 몸이 되어 이미 연합한자(Union with Christ)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성령의 역사를 통해 믿음의 통로로 날마다 수혈받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 위해 호흡하며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 것이라(갈 2:20) 

오늘날 한국 교회는 거듭남의 필요성과 본질이 너무나 왜곡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거듭남, 즉 중생은 칭의와 아울러 성화로 나아가는 출발임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그쳐 버림으로써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를 상실한 듯합니다. 청교도들의 작품은 철저하게 칼빈주의이자 개혁주의적 신학에 입각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위상과 사역에 관하여, 인간의 정체성과 교회론과 앞으로 닥칠 종말론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묘사하되, 단순히 조직신학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성도들이 깨닫고 인식하며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실천신학적 맥락에서 이를 잘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거듭남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부재하며 수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혹자는 로마서 10장 10절의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는 성경구절을 통하여, 입술의 시인을 곧 거듭남을 체험하는 과정으로 여기고 이렇게 따라 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단 종파중에는 입술로 고백한 이후 자신은 거듭남을 체험하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이제 더 이상 자신이 범하는 죄는 죄가 아니고, 자신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강조하며 이를 가르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처럼 거듭남에 대한 얄팍한 이해와 잘못된 가르침은 한국 교회가 썩어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기독교인의 삶의 질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창출시키고 있습니다.

스테판 차녹은 이 작품을 통하여 거듭남에 대한 정확한 본질과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거듭남과 칭의, 그리고 성화를 일목요연하게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즉, 이 세가지 구원족 요소는 상호 분리할 수 없는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거듭남에 대한 점검에 필요한 시금석으로서,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을 철저하게 들여다 봄으로써 이전에 좋아하였던 것들을지금은 혐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자기점검(Self-Examination) 작업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금석, 즉


과연 내게 하나님과 닮아가기를 바라는 뜨거운 열망이 있는가? 하나님의 통치의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어느정도인가? 내적이고도 영적인 의무들에 대한 나의 자세는 어떠한가? 말씀에 대한 나의 반응 정도는? 내 마음과 생활에 어떠한 거룩함의 요소가 있는가? 

등과 같은 믿음의 시금석을 통해 거듭남에 대한 확신과 성화에 대한 갈급함으로 삶을 채워 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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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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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 : 사도바울   

수신자 : 골로새교인들

시대적 배경

<골로새지역 :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는 브루기아(Phrygia) 지방의 도시로서 지금의 터키 남서부 지역에 해당합니다. 무역로 상에 있는 조그만 도시인 골로새에 세워진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것이 아니라 그가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행 19-20장)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1:7) 교회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에는 잡다한 신을 숭배하던 브루기아인들과 이곳에 이주해온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교와 유대교적인 환경의 혼합종교의 특성 때문에 교회 안에 이단 사상이 들어와 복음을 왜곡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거짓철학(2:8), 율법주의(2:16), 천사숭배(2:18), 금욕주의(2:23) 이었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교회를 위협하고있는 이단적 가르침을 공격하고 사도적 선포를 변호하기 위하여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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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강을 건너기 전 요단 동편의 땅에 정착할 수 있기를 요구한 지파는 므낫세 반, 갓, 르우벤 지파이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많은 가축들에게 적합한 땅임을 강조하였지만, 그것은 모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서편에 땅을 차지하게 된다. 요단 동편에 위치한 두 지파 반은 가나안 지역의 정복전쟁에 기꺼이 함께 동참해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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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부터 12장 까지의 내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사 입다에 대한 글입니다. 사실 사사 입다에 대한 글은 아니고 10장 - 12장 까지의 대략적인 개관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기드온에서 바로 삼손으로 넘어가면서 그 사이에 있는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기에 글로 올립니다. PDF 파일로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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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면서 이제 그들에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약속을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민족과 언약을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된다. 이제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은 아브라함-이삭-야곱 으로 부터 이스라엘의 아들 12명으로 시작된 12지파, 즉 이스라엘 전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언약의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언약적 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사랑하심과 그들의 열조인 아브라함 - 이삭-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 (신명기 7장 6-8절)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으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을 애굽에서부터 인도하실것을 작정하셨지만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계획, 그리고 그들과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언약적 민족(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언약이 충실히 이행됨으로써 그들은 신명기적 정체성과 축복을 누릴 것이며 여호와 또한 그들에게 여호와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하여 약 400년 동안 머물게 되었는데, 요셉이 총리로 있었던 힉소스 왕조 이후에는 애굽을 위하여 강제노동에 사용된 노예생활을 하게 된다. 압제는 점점 그 강도를 더해가서 자식중 사내아이는 출생 즉시 나일강에 버려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건져내시어 가나안 곧 그들의 열조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신다.

열가지 재앙 이후 아무런 제재없이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자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에 이를 때까지 약 40년간을 광야에서 머물게 된다. 불과 수 주일이면 도착할 가나안에 가는 길이 이처럼 길어진 까닭은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고도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과 행동 때문이었다. (민수기 14장 26-35절) 이미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수백년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고센지방이라고 하는 외딴 지방이라고 할 지라도 그들에게는 당연히 애굽의 생활방식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에게 치명적인 것은 족장(야곱. 이스라엘)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여호와 신앙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의 성격은 단순히 압제 받는 민족에게 주어지는 해방의 기쁨, 혹은 부르짖는 자들을 향한 여호와의 긍휼하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방식(곧 예배를 의미한다)과 그럼으로서 보여질 언약의 신실성, 진정한 통치자이신 여호와의 통치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단지 이스라엘은 언약에 충실할 뿐 이니라 여호와께로부터 받는 사명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삶은 단순한 하나님의 징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과 자세를 갖추게 하는 준비기간이었음을 아울러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다" (신명기 8장 2-6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의 구원으로 택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자신의 나머지 삶에서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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