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선교사는 1840년 9월 영국 웨일즈(Wales) 지방 라야다(Thayada)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59년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New College)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목회보다는 선교에 뜻을 두고, 갓 결혼한 부인과 함께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목사 안수를 받던 해에 중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해 가을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불행하게도 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다가 현지 런던선교회 책임자들과도 뜻이 맞지 않아 토마스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 지푸로 가서 세관에 취직하여 일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주재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을 만나게 되어 선교에 대한 열정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국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목선을 타고 산동성으로 피난을 온 한국인 천주교 신자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한국 천주교회가 어떻게 박해를 받고 있는가를 알게 된 그는 한국 선교의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그가 세관에 사표를 내고, 한국 선교의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한국으로 가는 배를 한 척 만나, 윌리암슨이 제공해 준 한문 성경들을 많이 갖고 한국의 서해안으로 떠난 것이 1865년 9월 이었다.

그는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昌麟島)에 도착하여, 약 두 달 반을 머물면서 섬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는 한편, 한국말을 배우면서 열심히 전도하였다. 가능하다면 국왕을 만나서 선교의 윤허를 받기를 원하였으나, 휘몰아친 태풍으로 만주 해안에 표류한 끝에 1866년 1월 어렵게 북경까지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런던선교회에서 경영하던 북경대학의 학장 서리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의 관심은 여전히 한국 선교에 모아져 있었다.

기회를 다시 찾고 있던 토마스는 천진에 체재 중인 미국 프레스톤(Preston)이 병약한 몸의 요양을 위해 여러 곳을 항해하던 중 그의 소유 상선 제네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많은 물건을 싣고 한국에 상업 차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1866년 7월 그는 그 배의 통역 겸 안내자로 동승하게 되었고,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던 한국으로 다시 향하게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런던선교회에 보낸 편지에 그때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생각에 가슴이 부풉니다....[런던 선교회] 이사들이 이 성경의 교훈을 전하기 위해 아무런 인간의 과오가 혼합되지 아니한 심정으로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인정해 주리라 믿으면서 나는 갑니다.

약 일주일 후 셔먼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여, 계속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평양으로 행진하였다. 배가 머무는 곳에 문정관(問情官)이 와서 목적지와 항해의 목적을 물었고, 토마스는 서투른 우리말로 통역을 맡았다. 문정관들은 무역을 하러 왔다고 대답하는 선원들에게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물러가라고 말했지만, 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상류로 항진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셔먼호는 무역선 답지 않게 중무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한국측에서는 퇴각 명령을 무시하고 상류로 깊숙히 진입해 들어오는 이 배에 대해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그 선원들이 문정(問情)을 하러 올라간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억류하고, 강압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강변의 병졸들과 성민들은 소리를 지르고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이에 셔먼호에서도 위협을 느껴 병졸들과 성민들을 향해 소총과 대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이런 와중에서 홍수로 불었던 대동강 물이 줄어들고 서해에 썰물 때가 되어 강물이 급격히 줄어들자 셔먼호는 강바닥에 좌초되어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의 명에 따라 상류에서 병졸들이 작은 배들을 여러 척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붙인 신탄선(薪炭船)을 떠내려보내자 셔먼호에 이르러 배가 불타기 시작하였다. 배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올라오게 되었고, 대기하고 있던 병졸들이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죽였다.

토마스 목사도 더 이상 배에 있을 수 없어서 성경 몇 권을 가슴에 품고 강으로 뛰어 내려 헤엄쳐 나왔다. 헤엄쳐 나온 토마스 목사를 퇴교(退校) 박춘권(朴春權)이 칼로 쳐 죽임으로써 그는 한국초기 선교역사에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개신교 성직자 순교자가 되었다. 그가 순교하던 때 그의 나이 27세 였다.

토마스 목사는 가슴에 품고 온 성경을 여기 저기 뿌렸고,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도 성경 한 권을 주었는데, 박춘권은 처음에는 받지 않았으나 되돌아갈 때 이것을 주워 집으로 가지고 갔다. 갖고 간 성경을 읽은 그는 후에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었으며 안주교회의 영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군중 속에 12살 난 소년, 최치량최치량(崔致良)이 있었는데 그는 토마스 목사가 던져준 성경 3권을 주워 갖고 있다가 두려워 그 중 한 권을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주었는데 그는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발라 쓴 것을 최치량이 후에 그의 집에 갔을 때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박영식의 집터에는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서게 되었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가 박영식의 집에 왔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예수를 믿고 후에 평양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 이눌서(李訥瑞, William Reynolds)의 조사(助事)가 되어 한국인 성서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큰 공헌을 하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박춘권의 칼을 맞고 죽었으며 그 시체는 토막 났고 이어 강변에서 불태워졌다. 셔먼호의 닻줄은 평양 대동문에 걸어 놓아 해방되던 1945년까지 남아 있었다. 그는 개신교 목사로서 이 땅에 최초로 순교의 피를 흘리고 죽어갔는데 이때가 1866년 9월 2일로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이렇게 숨져갔지만, 그가 전해준 복음은 한국 교회의 초석이 되었고, 그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신 많은 평양 성민들이 예수를 믿어, 평양은 한국 교회의 중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동양의 예루살렘”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1927년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그가 죽어 묻혔 있다고 생각되는 쑥섬에 1천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고, 1932년에는 토마스 목사의 이름 첫 자인 “T”자 모형의 토마스 목사 기념예배당을 지어 총회원 일동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하였다.

Posted by 굿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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