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는 최초의 순교자 아벨에서부터 시작해서 구약전체와 중간기를 거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 후 믿음의 선진들이 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도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로 언급된 사람들이 그들에게 약속된 것을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노아에게 약속한 것이나,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 약속한 이삭이나, 라합에게 약속한 것등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약속도 받았습니다(33)

그렇다면 왜 히브리서 11장 39절에서는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의 조상이들이 현세에서 받게되었던 약속을 초월하는 미래적이고 내세적인 약속에 대한 특징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믿음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탁월해 보이는 믿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속에서 증거를 받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믿음의 조상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이미 죽은 시체와 같이 생기나 생명과는 무관한 자들이었지만 믿음으로 약속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약속된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서 보고 있는 것(13)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서 사는 자신들을 이방인이요, 나그네라 하였고 본향을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아브라함이 실제로 보고 있고 바라고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현세에서 얻고 누리는 약속의 성취는 그 자체로 약속의 완전한 성취가 아니며 단지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질 종말론적인 완전한 약속의 성취를 미리 보는 예고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언급된 믿음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은 종말론적인 것이며 멀리서 보고 희미하게 보지만 분명히 확신하고 증거를 가지고 증언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담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았고, 아들을 바칠 수 있었고,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고, 12아들에게 축복하였고, 애굽을 떠날것을 기대하였고, 목숨을 걸고 아이를 지켰으며, 동족을 배반하는 일까지 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종말론적인 약속의 성취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야 말로 명백한 믿음의 대상이며 목적이며 약속이며 성취인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조상들이 믿고 바라보았던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조상들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바로 지금 신약시대인 지금 우리에게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에 충실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40절은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구약의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바라보았던 믿음의 대상이고, 증거를 얻게 한 동기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좋은 것” 은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2-44절에는 이미 신약의 신실한 성도들이 천상적인 예루살람에 도착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도 우리와 함께 온전함을 받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함을 받게 되는 것으로 그들이 생전에는 받지 못하였던 것이지만 이제 우리는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을 사는 성도들에게는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굳고 담대하고 순수하며 녿은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들보다 더 신실한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들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이지만 천국에서는 가장 낮은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은 구약의 성도들이 당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희미하고 멀리서 보는 것 같은 것을 보면서도 확신속에서 살았는데,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연합하여 함께 사는 우리에게는 더 나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미 그리스도라고 하는 실체가 우리에게 오셨고 희미하지 않고 선명해서 그분을 따라살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상의 기업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천상적이고 종말적인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신실하고 충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굿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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