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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26 믿음으로 살았으나 약속을 받지는 않았던 사람들 2
  2. 2011.07.09 엘리사

히브리서는 최초의 순교자 아벨에서부터 시작해서 구약전체와 중간기를 거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에 대해서 길게 설명한 후 믿음의 선진들이 다 믿음으로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도 우리는 믿음의 조상들로 언급된 사람들이 그들에게 약속된 것을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노아에게 약속한 것이나,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 약속한 이삭이나, 라합에게 약속한 것등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고 약속도 받았습니다(33)

그렇다면 왜 히브리서 11장 39절에서는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의 조상이들이 현세에서 받게되었던 약속을 초월하는 미래적이고 내세적인 약속에 대한 특징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히브리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믿음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탁월해 보이는 믿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속에서 증거를 받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던 믿음의 조상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이미 죽은 시체와 같이 생기나 생명과는 무관한 자들이었지만 믿음으로 약속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약속된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서 보고 있는 것(13)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서 사는 자신들을 이방인이요, 나그네라 하였고 본향을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아브라함이 실제로 보고 있고 바라고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현세에서 얻고 누리는 약속의 성취는 그 자체로 약속의 완전한 성취가 아니며 단지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질 종말론적인 완전한 약속의 성취를 미리 보는 예고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언급된 믿음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은 종말론적인 것이며 멀리서 보고 희미하게 보지만 분명히 확신하고 증거를 가지고 증언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담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았고, 아들을 바칠 수 있었고,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고, 12아들에게 축복하였고, 애굽을 떠날것을 기대하였고, 목숨을 걸고 아이를 지켰으며, 동족을 배반하는 일까지 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종말론적인 약속의 성취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야 말로 명백한 믿음의 대상이며 목적이며 약속이며 성취인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조상들이 믿고 바라보았던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조상들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바로 지금 신약시대인 지금 우리에게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에 충실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40절은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구약의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바라보았던 믿음의 대상이고, 증거를 얻게 한 동기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좋은 것” 은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2-44절에는 이미 신약의 신실한 성도들이 천상적인 예루살람에 도착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도 우리와 함께 온전함을 받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함을 받게 되는 것으로 그들이 생전에는 받지 못하였던 것이지만 이제 우리는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을 사는 성도들에게는 구약의 성도들보다 더 굳고 담대하고 순수하며 녿은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들보다 더 신실한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들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이지만 천국에서는 가장 낮은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은 구약의 성도들이 당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희미하고 멀리서 보는 것 같은 것을 보면서도 확신속에서 살았는데,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연합하여 함께 사는 우리에게는 더 나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미 그리스도라고 하는 실체가 우리에게 오셨고 희미하지 않고 선명해서 그분을 따라살고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상의 기업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천상적이고 종말적인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신실하고 충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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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

주제글 2011. 7. 9. 04:42


위클리프 사전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엘리야의 시종이며 후계자. 엘리사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를 의미한다.


  • 배경

엘리사는 요단 골짜기에 있는 아벨므흘라 출신 사밧의 아들이었다. 엘리야가 그를 부르기 위해서 갔을 때, 엘리사가 열 한 겨리의 소로 밭을 갈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가족은 상당한 부자였던 것 같다. 엘리사는 아주 어렸지만, 그의 소 한 겨리를 제물로 바칠 정도로 경건성이 대단하였다(왕상 19:16, 19-21)

  • 사역의 범위

그의 예언 사역은 북왕국의 여호람, 예수, 여호아하스, 그리고 요아스 치세에 해당되는 기원전 9세기 후반부에 이루어졌다. 그의 사역은 빚진 과부에서 부터(왕하 4:1), 부자와(4:8) 이스라엘 궁궐에까지(5:8, 6:9, 12, 21-22, 6:32-7:2, 8:4, 13:14-19) 미친다. 더 나아가서 다른 왕들과(유다의 여호사밧 - 왕하 3:11-19, 수리아의 벤하닷 - 8:7-9) 고위 신하들이(수리아 군대의 나아만 - 5:1, 9-19) 그의 도움을 원하였다. 그는 엘리야의 사명을 완성하고(왕상 19:15-16), 하사엘을 수리아의 왕으로(비교 왕하 8:12-13),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비교 왕하 9:1-10) 기름 부음으로서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나라의 영적인 전쟁에 대한 엘리사의 가장 큰 업적은 사무엘의 전통을 따라서 여러 중심지에 선지 학교를 주관한 데 있다(왕하 4:38-44, 6:1-7, 비교 삼상 19:20).

  • 기적

엘리사는 큰 기적을 행한 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성경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그보다 더 많은 이적과 기사를행한 사람은 없다. 모세 같은 선지자로서(신 18:15) 엘리사는 더러워진 물을 깨끗하게 하였고(왕하 2:19-22, 비교 출 15:22-25), 사막에서 물이 나오게 하있다(왕하 3:9, 16-20, 비교 출 17:1-6). 그는 과부에게 엘리야와 같은 기적을 행하였고(왕하 4:1-7, 비교 왕상 17:8-16), 죽은 자를 살려내기도 하였다(왕하 4:18-37, 비교 왕상 17:17-24), 그리스도의 기적과 비슷하게 그도 문둥병자를 고쳤고(왕하 5:14, 비교 막 1:40-44, 눅 17:11-19), 떡을 많게 하였다(왕하 4:42-44, 비교 마 14:16-21, 15:32-38), 또한 빌려온 도끼 자루가 뜨도록 한 것과(왕하 6:5-7),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약속한 것(4:11-17), 후게 그 여인이 기근을 피해 떠날 수 있도록 예언한(8:1)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도 우리 주처럼 긍휼히 여기는 지극함이 드러난다.

  • 인격

고행적이며 사람들 앞에서 떠나기를 바라던 엘리야와 대조적으로, 엘리사는 자기가 상대했던 백성들에게 가까이 가서 함께 사회 생활을 하였다. 그는 수도 사마리아에 집이 있었으나(왕하 6:32), 사무엘이 행한 것 같이 계속 그 나라를 이곳 저곳 찾아다녔다. 그는 자주 수넴에 있는 자기 친구들을 방문하였다. 엘리사는 하사엘이 이스라엘에게 가져다 준 무서운 재난을 잘 알고서, 그에게 말할 때 눈물을 흘렸다(왕하 8:11-12).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새 선지자를 대머리라고 조롱한 젊은이들과 그를 조롱한 불신에 대해, 사마리아에서 한 신하에게(왕하 7:1-2) 심판을 선언하기도 하있다(왕하 2:23-24, 비교 레 13:40-46). 확실히 엘리사의 사역은 세례 요한에 의해서 재현되었다(마 17:10-13).

  • 사역의 시작

여호사밧왕 때 이스라엘과 유대 군대의 종군 선지자로서(왕하 3:11-19), 엘리사의 첫번째 공생애는 엘리야의 승천 이전인 것 같다(2:1-18). 엘리야는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왕에게 심판물을 써 보냈었다(대하 21:12-15). 그 원정에서 엘리사는 계속 엘리야의 시종이었고,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왕하 3:11) 사람이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자기 주인의 온전한 능력과 신을 부여받지 못했었다. 이것은 그가 예언하기 전 거문고 타는 자를 그 날에 불러오게 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3:15, 비교 삼상 10:5-6, 대상 25:1). 엘리야가 떠날 때 엘리사가 두 몫을 요구한 것은 신 21:17 의 기업의 법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 경우에 능력있는 선지자의 수제자의 특권으로서 장자의 분깃과 같은 권리를 요구하였다. 히브리 본문 베루하카 엘라이 에 의하면 엘리사는 스승에게 나타났던 성령의 역사가 자신에게 갑절이나 임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왕하 2:9). 따라서 엘리사가 자기 스승의 능력보다 두 배 혹은 그 이상이 되도록 요구한 것으로 추측해서는 안된다.

  • 마지막 사역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올라갈 때, 어린 선지자는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왕하 2:12) 라고 외치며, 엘리야가 배교 때에 이스라엘을 위한 영적 방위군, 실제의 '군대'였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반 세기 후에 같은 외침이 요아스왕에 의해 엘리사에게 행해졌다(왕하 13:14). 그가 죽을 때, 선지자는 자신의 마지막 역할, 즉 수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을 방어하도록 왕에게 권고하는 일을 수행하였다(13:15-19). 왕이 화살을 쏘고 자기의 화살로 거듭 땅을 치는 그러한 객관적 표현은 구약에서 예언적인 심판과 함께 자주 나타난다. 엘리사는 죽은 후에도 영향력이 계속되었다.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마침 적이 침공하여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에 급히 던지자, 기적적으로 그 죽은 사람의 몸이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자 곧 소생하였다(왕하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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